사회와의 관계
나를 알기, 나를 돌이켜보기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는 선택이 나의 몫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의 선택 알기에서는 선택할 수 있음에도 선택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 선택할 수 없음에도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 등을 통해 자신의 선택인지 아닌지로 나누고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것이다. 그리고 선택함에 있어서 개인이 인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기에 사회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을 토대로 자신이 원하는 나와 사회 안에서 원하는 나를 분리하고 사회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선택이라도 하면 안 되는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아볼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말하는 선택은 선택가능여부에 해당하는 필수조건이 갖춰진 채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의 선택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운동을 예시로 들었을 때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필수조건이 갖춰져야 선택이 가능하고 육체적 필수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선택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고로 육체적 한계, 정신적 한계에 대한 필수조건이 갖춰졌는지, 갖춰지지 않았는지에 따라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선택이 가능과 불가능으로 명백하게 나뉜다. 그런데 선택가능여부를 분별하지 않고 필수조건이 성립하지 않음에도 선택하려 하거나 필수조건이 성립함에도 선택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등의 상황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조건에 맞춰 미리 분별해 놓는다면 선택에 대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상황에 따른 예방을 미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이 가능한지 모른다.
선택이 가능한지를 잘 몰라서 선택할 수 없다고 여기는 거라면 경험을 통해 선택가능여부를 탐구할 수도 있고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필수조건이 갖춰졌는지에 대한 분별능력을 키워서 개선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능력이란 비가 내리는 원리를 잘 모를 때는 비를 원해서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가 내리는 원리를 아는 지금은 비가 내리기를 원한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분별능력이다. 고로 비가 내리는 원리를 알게 되는 과정을 자신에게 대입해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필수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면 잘 모르던 선택가능여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선택이 가능한지 모르는 것은 비가 내리는 원리를 모르는 것과도 같다.
자신의 선택을 부정한다.
대체로 자신이라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자신의 선택을 부정한다. 여기서의 부정은 노력, 실천성등의 요소를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 실천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서 자신은 노력, 실천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당화를 하고 나면 당장에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는 있으나 이를 반복하다 보면 실제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별력자체가 떨어진다. 분별력이 떨어지고 나면 결국 자신이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선택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최악의 경우 갖춰져 있던 전제조건마저 사라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원하는 선택을 저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면 필수조건이 성립할 때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알기, 나를 돌이켜보기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해봐야 한다. 그리고 마주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불가능한 상황으로 돌리게 되면 자신이 선택 가능한 부분마저 불가능하다고 여겨 자신이 결정한 선택임에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수조건이 갖춰졌을 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바라기만 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은 행동을 하지 않음에도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얼핏 보면 선택을 부정하는 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르게 분류된다.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 행동하지 않고 정당화를 하는 것이라면 행동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고 그저 바라기만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선택의 필수조건에 육체적, 정신적 한계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면 행동이라는 필수조건이 성립하지 않을 때는 행동만 하면 선택이 가능해진다. 고로 행동이라는 필수조건이 채워져야 하는 상황에서 행동하지 않고 그저 바라기만 하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없기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음에도 바라는 것을 넘어 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만약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란다면 복권을 사는 행동이라는 필수조건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음에도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필수조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선택할 수 없음에도 행동하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필수조건이 갖춰졌고 행동만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동만 하면 선택할 수 있지만 반대 상황인 필수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노력을 해도 선택할 수가 없다. 이는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해도 불가능한 육체적 한계, 정신적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믿음, 소망등의 착각에 빠져 허상에 기대게 되면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게 되고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원하는 선택에서는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필수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노력만 하면 모든 것이 이뤄질 것이라는 착각을 심는 함정들을 미리 주의하고 경계해야만 한다.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모순.
앞서 말한 선택의 모순점들은 자신이 누리는 안정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질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선택하고 변화하기보다는 안정되고자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며 안주하는 것이라면 정당화가 아닌 합리화가 되고 필수조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에 의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옳은 일이 된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며 안정감을 얻을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안정감을 쟁취할 것인지 중에 정해진 정답은 없어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파악하고 자신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만약 스스로 파악하기 위해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 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모순을 발견한다면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거나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고 있다면 자신을 속이면서 정당화를 하는 수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안주하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닌 것처럼 안주하지 못하면서 정당화를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다. 이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는 과정으로 쌓인 모순들이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이 되기 위한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연결된다. 고로 현재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지 못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모순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실현가능성, 현실성을 고려해서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별능력을 키워 검토해봐야 한다. 자신의 선택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선택할 수 있음에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기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필수조건이 갖춰져 있고 정당화도 하지 않았는데 선택할 수 없다면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사회의 기준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랄 수 있기에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선택을 할 때 사회와의 관계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래서 사회의 기준이 되는 법이나 규칙, 제도를 무시할 수가 없는데 만약 법이나 규칙, 제도가 지켜져야 할 합당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자신의 선택으로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자신을 범죄자라는 결과물로 만드는 선택을 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사회에는 부당한 법도 있기에 합당하다는 가정을 제외하면 자신이 옳아도 사회의 기준에 의해 되려 부당한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합당하지 않은 사회와 법으로부터 부당한 상황에 쳐해 질 수 있기에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임에도 사회의 잘못으로 돌리 것이 더 그럴싸해 보이고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그럴싸해 보이는 인지착오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면 법이나 규칙, 제도가 합당한 지를 분별해야 하고 합당한 법이나 규칙, 제도만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범죄자라는 결과물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반면에 합당하지 않은 법이나 규칙, 제도만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는 사회의 상황에 맞춰서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어필하거나 범죄자가 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고로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합당한 것인지와 사회의 기준이 합당한 것인지를 구분 짓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기에 자신의 선택과 사회의 기준을 구분 지어야만 한다.
자신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에서 공부를 잘하고 싶을 때는 스스로 공부를 해서 잘하게 되면 끝이지만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공부를 잘하고 싶을 때 스스로 공부를 해서 잘하게 되더라도 사회의 기준에서 공부를 잘하는 기준을 넘지 못하면 공부를 못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선택은 공부를 잘하기 위한 선택을 했는지를 중점으로 두고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선택은 사회의 기준에서 공부를 잘하는지를 중점으로 둔다. 더 세세하게 자신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정한 합의점을 기준으로 나누면 공부를 잘하는 기준은 그에 맞춰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선택이 사회의 영향을 적게 받는지, 많이 받는지가 결정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선택에 의한 '나'라는 결과물이 있는 것처럼 사회의 기준을 따르는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선택에 의한 '나'라는 결과물이 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나'라는 결과물은 변함이 없어도 자신과 사회중 무엇을 기준으로 두는지에 따라 결과물에 의의가 달라질 수 있고 이에 따른 자신의 선택은 자신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에 따라 재검토해봐야 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알아볼 때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은 자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고 자신이 사회에게 원하는 것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게 원하는 것이라서 자신을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자신의 기준과 사회를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사회의 기준을 분리하고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선택과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선택에 대한 범주를 다른 것으로 구분 지어야 한다. 이렇게 구분 지으면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사회의 기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명백하게 달라지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사회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 다수의 선택을 따라가는 것과 사회의 기준을 따라가지 않는 것, 다수의 선택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 된다.
선택의 시작점과 사회와의 관계
관점에 따라 무엇이 선택의 시작점인지가 달라질 수는 있으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장단계, 발달단계등의 시점이 아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시점을 관점으로 잡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사회가 먼저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더라도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선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선택이 시작점이 된다. 그렇다고 자신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정의할 수는 없으며 자신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 중에 자신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우선순위로 두는지에 따라서 중요도가 달라진다. 예외적으로 자신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사회의 절대적 통치권자라면 사회가 자신의 선택을 따라가기에 자신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가 동일시된다. 그렇다는 것은 사회의 절대적 통치권자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선택과 사회의 기준이 같을 때는 그것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사회의 선택이 같은 것일 뿐으로 자신의 선택이 사회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고로 자신의 선택은 사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닌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먼저이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