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책략
황제 세르바부스가 입술을 한 번 다물고, 단숨에 열었다.
“카일리스를 처형하라.”
단호하되 필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대리석 홀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고 촛불은 흔들리지 않고 길게 섰다.
명령은 설명이 아닌 결론이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명령을 받은 루카르는 고개를 숙이고 홀을 나섰다.
발걸음은 가벼웠다기보다 정확했다.
이미 계산은 끝났고, 오늘은 그 계산이 모양을 갖추는 날이었다.
서쪽 회랑이 길게 뻗어 있었다.
벽에 걸린 전승 기록과 화친 문서, 꺾인 반란 가문의 문장이 시야를 스쳤다.
그중 절반 이상은 카일리스가 이뤄낸 것들이었다.
루카스는 카일리스에게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날의 밤과 낮들이 떠올랐으며 이내 첫만남에 도달했다.
그를 처음 본 건 궁 밖의 연회였다.
늦여름 초저녁 붉은 천막 아래 귀족과 상인, 시인과 학자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한 시인이 장황한 운율을 늘어놓자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품을 했다.
그때, 어린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세 구절이면 충분합니다.”
첫 구절은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담았고
둘째 구절은 그 바람이, 지나간 얼굴의 표정을 그렸으며
마지막 구절은 그 얼굴이 다시 바람이 되는 순간을 노래했다.
정적이 흘렀다. 웃음기마저 사라진 사람들의 눈이 소년의 입술에 매달렸다.
어린 소년이 붉은 천막 아래로 걸어 나와 읊은 단 시의 구절은 짧았지만 듣는 이들의 호흡을 한 번씩 붙들어 매는 힘이 있었다. 루카르는 군중의 표정이 동시에 바뀌는 걸 보며 소년의 언어가 단순한 재능을 넘어 사람들을 사로잡는 능력임을 알아챘다.
이어 그 어린 소년의 주변을 맴돌며 도착한 곳은 다수의 사람이 구경하는 샤트란지(궁정에서 즐기던 옛 체스) 판이 펼쳐진 테이블이었다. 어린 소년의 상대는 샤트란지 판에서 이름난 귀족이었고 초반 두 수는 서로 무난했다. 그리고 세 번째 수, 소년이 말 하나를 가볍게 내주자 주변에서 실소가 났다. 그러나 네 번째, 다섯 번째 수가 이어지자 이름난 귀족의 이마가 굳어졌다. 내준 말은 미끼. 중앙은 비워졌고 측면의 길이 잠겼다. 체크메이트는 아직 아니었으나 되돌릴 수 없는 세 번째 수로 이미 균형은 무너졌다.
차릴 자존심도 없이 빠른 포기로 말을 눕히는 귀족을 보며 루카르는 확신했다.
광대의 옷을 입혀도, 황제의 수를 둘 수 있는 아이.
그날 밤 어린 소년은 황실 문턱을 넘었다. 그가 바로 카일리스였다.
처음엔 루카스의 지지를 받으며 입궁한 카일리스를 황제 세르바부스 또한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승전과 평화의 균형이 카일리스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황제의 짧고 단호한 칭찬에는 항상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소년의 눈빛이 더 깊어질수록 황제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의 불씨가 피었다. 그러자 평가는 감시로, 신임은 경계로 변했다.
어느덧 자신의 위치마저 내어준 루카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
“폐하, 저 아이의 뿌리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왜지.”
“엘렉티오의 피라면, 언젠가 명분이 됩니다.”
권력에 취해 잊고 있던 존재.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첫 황제 엘렉티오. 황실에는 현 황제 세르바부스를 대적할 자가 없었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성장해도 명분을 가지고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엘렉티오의 후손 카일리스.
그 말은 씨앗처럼 박혀, 황제의 밤마다 자라났다. 서고에서 오래된 족보가 펼쳐지고 핏줄이라는 단어가 궁정의 회랑을 떠돌았다. 능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충성은 증명할 수 없었다. 결국 세르바부스의 마음속에서 '언제든 위협이 될 자'라는 결론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결론은 명령이 되었다.
서쪽 회랑 끝 루카르가 카일리스 처소의 문을 열었고 카일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루카르는 담담하지만 마치 전쟁을 준비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이 내려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카일리스는 이 상황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바보가 될 때군요.”
그 말과 표정에서 루카르는 이미 결과를 읽었다. 스스로 권력의 판 밖으로 빠져나와 죽음을 피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위협이 사라진다는 것을. '죽이지 않아도 위협은 사라진다.'
그날 오후 약 13시경.
카일리스는 호위에 둘러싸여 홀로 서있고 황제 세르바부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네 피가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말하라.”
그 한 문장이 그곳의 공기를 바꿨다.
그 공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카일리스의 눈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아주 짧게 빛났다. 그리고 꺼졌다.
이내 호흡은 들숨은 짧게, 날숨은 길게 바뀌었고 어깨선은 한 마디 내려앉았다. 초점은 천천히 미끄러져 멍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폐하, 저는… 오늘 먹은 저녁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말끝은 긴 호흡을 타고 허공을 맴돌았다. 귀퉁이의 신하 하나가 황제에게 닿지 않을 만큼 작게 킥 하고 웃었다. 카일리스가 덧붙였다.
“그저 오늘 아침,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카일리스는 두 손을 모아 강아지의 앞발처럼 흔들며 흉내를 냈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시 달린 장미를 입으로 집어들어 씹었다. 가시가 입안과 입주변을 찌렀고 붉은 점이 입가에 번졌다. 그는 그 가시채로 장미를 꿀 삼키듯 먹으며 웃었다.
잠시나마 돌았던 웃음의 공기는 어느새 경멸로 바뀌었고 단호했던 세르바부스의 입매가 풀렸다.
위협의 형상이 쓸모없음의 그림으로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쓸모없는 자를 죽일 필요는 없다. 내 눈앞에서 치워라.”
바보연기를 한다는 것을 아는 루카르는 고개를 숙였다.
더 볼 필요가 없었다.
가장 효율적인 결정은 끝났다.
해 질 녘, 황실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카일리스는 어깨에 작은 보자기 하나를 걸치고 문턱의 경계를 넘었다.
등 뒤에서는 조롱이 날아들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다시 초점을 찾았다.
바보의 가면은 완벽했다. 그리고 그 가면은 그에게 자유를 찾게 해주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절벽 앞에 도착한 카일리스는 생각하며 다짐했다.
항상 예술을 꿈꿨으나
왕궁에 갇혀 무감각하게 살았다.
그곳에서의 공기는
칼로 베어진 것처럼 차가웠으며
그곳에서의 음식은
냉혹한 현실로만 다가왔으며
그곳에서의 나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닌 채로,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닌 채로
바보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왔다.
바보가 바보라고 증명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왔으니
자유를 찾겠노라.
언제든 세상을 떠날 수 있기에
자유를 찾아 떠도는 바보로 살 것이다.
바보 카드 - 자유, 시작, 순수함
무모해 보일지라도, 대책 없어 보일지라도, 현실성이 떨어져 보일지라도
그 누가 카일리스를 비웃을 수 있을까?
그가 처음 황실을 향했을 때 꿈꿨던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체스 말이 되어 황제를 향하는 말들을 제거해 나갔을 뿐이다.
체스판에서 벗어난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원하는 자유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아무도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