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그늘
테라노바 왕궁의 아침
마차가 들어오고 나간 길 위로 바큇자국이 겹겹이 새겨진다. 곡간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짐을 나르는 하인들과 수량을 꼼꼼히 체크하는 창고지지가 분주히 움직인다. 그리고 로지아 난간에 기대어 이 분주함을 구경하는 소녀 아스테라가 있다. 분주한 사람들과 달리 홀로 고고함을 유지한 아스테라는 구름처럼 흩날리는 밀가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왜 나는 저 하인들과 함께하지 못하지? 나도 창고지기처럼 잘 계산하고 정리할 수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저 아저씨, 아줌마들은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왜 나는 고개를 숙이면 안 되는 걸까? 만약 이 흩날리는 밀가루가 진짜 구름이 된다면 가능해질라나?'
아스테라가 종종 하는 이러한 궁금증과 생각, 상상들을 주변의 어른들, 귀족들에게 이야기할 때면 테라노바 영주의 딸이니 당연하게 고고히 풍요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만 해주었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지만 항상 이야기의 마무리로는 격식 차린 인사치레로 넘어갔다.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정작 정말로 원하는 것은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는 삶이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를 움직이는 손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지지를 않았다.
반복된 일상 속에서 그나마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책이었다. 책을 가장 가까운 벗으로 삼으며 열두 살이 되던 해. 아스테라의 이름은 봉인된 붉은 문서 아래 약혼이란 문구 옆에 적혔다. 그날 저녁 테라노바의 정원은 평소처럼 향기롭고 식탁은 평소보다 풍성했으나 의지와 상관없는 약혼을 한 소녀의 마음은 평소보다도 풍요롭지 못했다. 그렇게 밤이 되자 소녀의 눈에는 테라노바의 아름다운 별빛이 유독 낯설게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의 마차가 아스테라를 데리러 왔다. 황궁의 문턱은 향과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테라노바의 흙냄새와는 다르게 광택의 내음이 공기를 메웠다. 황궁에서도 테라노바처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규율만은 달랐다. 이 규율은 테라노바에서는 어렴풋이 느꼈지만 와닿지 않던 사내의 길과 여인의 길이 다름을 명확하게 느끼게 했다. 테라노바에서는 가끔 장부를 구경할 때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황궁에선 단호한 눈빛을 한 서기관이 부드러운 어투로 차갑게 말했다.
"이 일은 여인이 관여할 일이 아닌듯합니다."
아스테라는 궁금증이 많은 만큼 황궁에 대한 마음이 점점 닫혔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에 둘러싸여 있는 듯 온몸을 곧추세우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어느샌가 황궁에서 원했던 황후의 모습이 되어갔다.
아스테라는 자신이 달라진 모습을 스스로 느꼈고 그 달라진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궁금증에 고고함을 유지하라던 귀족들의 말은 이런 걸 뜻했을지도 몰라. 여기도 똑같이 풍요가 넘치고 원하는 것을 전부 다 할 수는 없지만 뭔가 여기는 더더욱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는 것 같아. 테라노바에선 질문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는데 여긴 마치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만 같아.'
황후가 되던 해
열다섯이 되던 해 아스테라는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관계였기에 황제 세르바누스의 곁은 차갑고 냉정했다. 아스테라에게 황후라는 자리는 황제의 장식품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전 황후가 출산 도중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뒤 새로운 황후가 된 것이었기에 황궁은 조용히 새로운 황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의 소식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아스테라의 배를 훑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만으로도 기대감과 무언의 압박감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감과 압박감을 감당하기에는 아스테라가 아직 너무 어렸기에 이와 관련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다가와 '나'의 삶이 점점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해 겨울 아스테라의 뱃속에는 작은 울음이 깃들었다. 새로운 생명의 소식은 빠르게 퍼져 황궁에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아스테라가 느끼던 기대감과 압박감은 더욱 깊어졌고 그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나는 준비가 된 걸까? 내가 품은 이 작은 고동은 나의 것일까, 황궁의 것일까?'
아스테라는 아직 겉모습만 황후의 모습의 되었을 뿐 실제 몸과 마음은 아직 질문투성이의 어린 소녀였기에 임신은 기쁨보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래서인지 안타깝게도 생명은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꽃망울이 열리기도 전에 떨어지듯 고동 소리는 사라졌다. 이 소식도 황궁에 빠르게 퍼졌다. 황궁 사람들은 조용히 위로의 말을 흘리고는 이내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섰다. 그렇게 황궁은 늘 그래왔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흐름을 이어갔다. 그들이 아이를 잃은 슬픔을 함께 감당하기엔 시대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녹록지 못했다.
아스테라의 시간의 흐름은 고동소리가 멈춘 날 함께 멈춰 섰다. 밤이 되면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고동소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정원에 나가 쥘 수 없는 흙을 움켜쥐는 상상을 하며 체념했다.
'내 몸도, 내 삶도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가 봐. 그런데 이 공허함은 왜 오로지 나의 몫인 걸까?'
황궁에서는 아무도 황후를 다그치지 않았으나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압박이 피어났다. 황자는 언제든 기다려지고 있었고 그 기대와 압박은 말없이 황후의 어깨를 눌렀다. 황후 아스테라는 그저 체념하고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
아스테라의 멈춰있던 시간의 흐름은 새로운 생명과 함께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금 시작된 작은 고동은 다행히도 아스테라의 품속에 안길 수 있었다. 아이의 탄생은 새로운 삶의 이유가 되었고 황궁사람들은 황자 세르바보스의 탄생에 잔을 높이 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전 황후의 죽음 이후 잠겨있던 비운의 공기가 비로소 풀린 듯했다.
아스테라는 세르바보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세르바보스 너는 황실의 아이이기 전에 나의 아이야.”
첫 유산으로 시간이 멈춘듯한 공허가 있었기에 세르바보스는 아스테라에게 빛 같은 존재였다. 세르바보스도 유독 아스테라의 품 안에서만 웃었고 그 웃음은 황궁의 차가운 회랑을 잠시나마 따듯하게 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황궁의 규율은 아이의 웃음을 빼앗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전 황후의 죽음, 아스테라의 유산 등으로 미뤄졌던 황궁의 모든 기대감은 예법, 고전, 무예, 연설 등의 방식으로 압박이 되어 세르바보스를 향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언어로 가득 채워진 세르바보스의 하루에 유일한 웃음을 가져다주는 건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아스테라의 노랫소리였다.
아스테라는 항상 세르바보스의 시간의 틈을 기다리며 틈틈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대화를 나누며 품에 안았고 속으로는 마음을 삼켰다.
'나는 테라노바 영주의 딸로 태어나 원하는 삶을 잃었고, 너는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웃음, 삶을 잃어가는구나.'
세르바보스가 잠든 후에도 찾아가 한참 동안 손끝을 놓지 못하곤 했다. 황궁에서는 세르바보스를 그저 황실의 후계자로 보았으나 아스테라에게는 연약한 아이일 뿐이었다.
풍요의 그늘
세르바보스가 여덟 살이 되던 해 겨울,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불었다. 의관들이 맑은 약을 달여 오며 곧 가라앉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간단히 해결될 미열이라 여겼다. 아스테라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세르바보스의 숨은 급격히 짧아지고 이마의 열은 내려갈 기미는커녕 되려 높아져만 갔다.
아스테라는 의원들의 말을 굳게 믿었지만 두려움이 앞서 세르바보스의 옆을 지키며 속삭였다.
“세르바보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나의 아이야. 괜찮아질 거야. 얼른 나아서 나와 함께 더 살자.”
그러나 세르바보스의 손끝은 점점 차가워졌다. 황궁은 여전히 규율에 맞춰 움직였다. 내관과 의관들은 분주히 오갔으나 누구도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다. 황궁은 슬픔조차 규율로 가둔 듯했다. 그렇게 차가운 규율 속에서 세르바보스는 아홉 살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황궁의 모든 금빛 장식이 무색해졌다. 소리 없는 공기가 회랑을 메웠고 오직 아스테라의 울음만이 길게 메아리쳤다.
며칠 동안 아스테라는 정원에 앉아 황후라는 규율 속에 만져서는 안 됐던 흙을 손으로 짚어 흩날려가며 분수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은 여전히 오르내렸고 저 멀리 곡간에서는 여전히 곡식이 창고로 드나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과 황궁의 시간의 흐름은 이어졌으나 아스테라의 안에서는 시간뿐만이 아닌 모든 흐름이 멈춰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세르바보스의 죽음을 알 수 없는 병과 약한 아이였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아스테라는 달리 느꼈다.
'세르바보스는 황궁의 무게 속에서 웃음을 잃어갔고 결국 그 무게가 숨소리마저 꺾어버렸어. 이건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다음에 품을 아이만큼은 황궁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먼저 배우게 해야 돼. 웃음을 잃게 내버려 둘 순 없어, 꺾어지게 만들 순 없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그날 이후 아스테라의 의문은 더 이상 소녀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아스테라의 의문은 삶을 향한 결심이 되었고 그렇게 가슴속에서 꺾이지 않는 씨앗이 자라 잡기 시작했다.
여황제 카드 - 풍요, 모성, 창조
날 때부터 주어진 풍요로운 삶을 사는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삶이 그저 이상향이고 마냥 부럽기만 했을 것이다.
허나 아스테라가 바라본 자신의 삶에서의 풍요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인형의 삶에 불과했다.
여자의 삶과 남자의 삶이 나눠지는 시대에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이 있음에도 꿈을 펼치지 못한 아스테라는
자신의 아이마저 황자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한 채 죽는 걸 봤다.
꿈을 펼치지 못한 것은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닌
의문을 가지던 잘못된 규율 때문이란 걸 그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