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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여사제

여사제의 두 얼굴

by 오필

상담가의 얼굴

수도원의 작은방.

가늘게 타들어가던 향초의 연기가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아직 방 안에는 눈물과 한숨의 여운이 머물러있다.


여사제는 내담자의 손등을 가볍게 덮은 채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렇게 말로 꺼냈으니 마음의 무게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거예요.”


내담자의 눈물 자국은 향초와 함께 사라져 갔고, 불안의 흔적은 안도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상담이 끝난 후 내담자가 떠나간 자리로 산들바람에 스며들었다.

그 산들바람에 여사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원하던 삶을 느낀다. 누군가의 삶을 가르는 칼날은 없고 오직 마음을 듣고,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일. 여사제가 아닌 상담가로 머무를 수 있는 시간.'

씨앗을 품은 채 사리진 빈자리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고 여사제는 그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발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무거운 발소리는 잠시 문 앞에서 멈췄고 이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의 대신 루카르였다.

“엘리안 여사제님 폐하께서 자문을 구하십니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 그랬듯 단정히 정제되었다.


그의 곁에는 평소와 다르게 산들거리는 바람과 함께 있었다.

또래와는 다른 단단한 눈빛을 한 서류를 품은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일리스입니다. 황궁에 발을 들인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인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산들거렸고 순간 여사제는 방금 전 느끼던 감상으로 다시 빠져들였다.

'제자... 그리고 후계자...' 그렇게, 마치 계시를 받은 듯 과거를 회상했다.


회상 – 계승의 날

계승을 위한 종소리가 세 번 울리자 성전 안은 고요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한 소녀에게 쏠려 있었다.

전 여사제가 소녀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 나와 소녀의 양손을 받들듯이 끌어올렸다.

“이 아이가 바로 다음 여사제입니다.”


성전을 울릴 만큼 강한 환호가 쏟아져 나왔고 몇몇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러나 여사제가 된 소녀에게는 축복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씌워진 여사제의 무게,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었다. 소녀의 귀에는 강한 환호가 거대한 웅성거림처럼 들렸다.


열띤 환호와 기도 속의 계승이 끝난 뒤.

전 여사제는 소녀에게 여운을 남기듯 속삭이고 포르투나 엘렉티오를 떠났다.

“들은 것이 있어도 모든 걸 다 말할 필요는 없어. 항상 먼저 듣고 기다려. 말하는 순간만큼은 너의 선택이야.”

소녀는 아직 계시를 들은 적이 없었기에 전 여사제의 말이 계시처럼 남았다.


그날 이후의 삶은 소녀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사소한 분쟁부터 영주의 운명까지 오로지 소녀의 직감으로 선택되는 순간,

계시가 없음에도 계시처럼 전달되는 말은 누군가의 삶을 결정지었다.

전 여사제가 왜 자신을 제자처럼 데리고 다니며 계승 직전까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는지를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황궁이 요구하는 선택의 무게에도 초연한 여사제의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는 차분해졌고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승되었던 그날의 열세 살 소녀는 여전히 내면 어딘가에 남아 있다. 상담하는 순간만큼은 여사제가 아닌 소녀로 돌아갔다. 마음을 덜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상담사가 원래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람들이 원하는 건 결국 여사제로서의 상담가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녀로 돌아가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 어디에도 여사제가 아닌 엘리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항상 여사제라는 역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런데 어디선가 엘리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엘리안..."


다시 수도원의 작은방

"... 엘리안님?"


방금 전까지 과거에 잠겨 있던 여사제는 낯선 카일리스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카일리스는 서류를 품에 안은 채 또래와는 다른 단단한 눈빛으로 엘리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 카일리스의 부름 속엔 아직 때를 타지 않은 또렷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엘리안에겐 소년이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였다.

'저 눈빛... 너무 이르다. 저 아이도 나처럼 이 길에 일찍이도 던져졌구나.'

동질감에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대답했다.

“잠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었어요. 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있는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하지만 무척 무겁고... 외로워 보였어요."


소년의 말에 엘리안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나이에, 저 눈빛이라니. 어린아이가 나의 무게를 엿본다. 그게 놀랍기도, 서글프기도 하다. 내가 13세에 이미 여사제라는 길 앞에 놓였듯이 저 아이도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무게를 짊어지겠구나.'


엘리안의 눈길이 순간 흔들리자 옆에 있던 루카르가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이의 눈이 예민한 탓일 겁니다. 그러나 여사제님은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어 보입니다.”


엘리안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루카르의 말속에 담긴 차가움과 함께 작은 배려 또한 읽었다.


소년은 곧장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함부로 여쭈어선 안되었습니다.”


루카르는 카일리스를 잠시 흘깃 본 뒤 다시 차분히 정리했다.

“아이를 넓게 헤아려 주십시오. 앞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겁니다.”


엘리안은 루카르의 말을 듣고는 소년 카일리스를 향해 미소를 띠며 답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듣는 일은 원래 무겁게 보이는 법이에요. 그것이 제 몫이다 보니 외롭다고 느껴졌나 보군요.”


산뜻한 바람으로 다가온 이 날의 만남에서 엘리안이 계시를 받은 듯한 회상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년 뒤 – 무게를 나누는 법

황궁의 회랑에서 폐하의 소전에 들어가기 전 의견을 추리는 사전 협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회랑의 대리석 기둥 사이로 빛이 흘렀지만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정들과 대신은 오늘 결정한 사안을 여사제에게 묻기로 결정했다. 이는 오래된 관례대로 변수가 크고 민심이 흔들릴 우려가 있는 사안일 경우 책임을 분산하기 위해 여사제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여사제가 회랑에 도착하자 대신은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고 여사제는 그 자리에 앉는다.

대신 루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여사제에게 형식처럼 묻는다.

“두 갈래 상신 안을 추려 폐하께 아뢸 것입니다. 테라노바 동쪽 직로, 혹은 마로바 남서 우회로.

여사제의 견해는 범위를 좁히는 방향으로만 듣겠습니다.”


상담가가 아닌 여사제의 얼굴을 하고 온 엘리안은 잠시 생각했다.

'계시는 없다. 오로지 직관과 냉정함으로 판단한다. 그저 정해진 길대로 결정한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킨다. 이 결정은 누군가의 운명을 가를 수밖에 없겠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던 그녀는 마음을 다잡은 후 고개를 끄덕이고 결단을 내리려 한다.


그 순간, 회랑에는 단호하고 단단한 음성이 울렸다.

“테라노바 동쪽 직로는 빠르게 해결은 가능하나 적의 정찰 병력이 늘어난 만큼 위험합니다. 민가와 겹치는 만큼 사소한 다툼에도 민가에 고스란히 피해가 전달됩니다. 마로바 남서 위회로는 위험요소가 줄어든 만큼 식량전달이 원활하지 않을 겁니다. 민가의 손신율이 낮아진 만큼 보급주기는 늘어날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옮겨간 곳엔 열일곱이 된 카일리스가 있었다.

손에 든 도표와 기록은 정확했고 말은 간결했다.

조정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르는 카일리스의 책략이 자신을 뛰어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카일리스의 말이라면 신뢰할만하다. 다만, 앞으론 여사제가 도착하기 전에 의견을 마무리하도록 하라. 여사제는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여사제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수많은 상담을 통해 누구보다 많은 상황과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곰곰이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택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해요. 다만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테라노바 쪽을 택한다면 민가 징발을 금하고 사흘 유예를 두어 피란민을 먼저 통과시키세요. 그리고 마로바 쪽을 택한다면 그 마을의 제방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마세요. 봄물이 들면 값싼 수리로는 한 계절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길을 택하든 곡물은 민가, 성전 창고가 아닌 관창고에서만 내어야 합니다. 민가, 성전 곡식을 건드리면 민심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말이 끝나자 조정들 사이에서는 숨소리만 오고 갔다.

여사제는 카일리스 덕분에 정해진 선택이 아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었다.


"좋습니다."

루카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정들에게 말했다.

"여사제께서 선을 그었다. 오늘은 이 선을 준수한 채로 마로바 남서 우회로를 1안, 테라노바 동쪽 직로를 2안으로 정리해 폐하께 아뢸 것이다."


회의가 정리되자 조정들은 문서철을 모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루카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소전까지 두 시각. 시간이 없다. 각자 맡은 부분을 정리해오라.”


조정들이 빠르게 흩어지자 길게 뻗은 회랑에는 잠시 동안 카일리스와 엘리안 두 사람만이 남았다.

카일리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엘리안님 방금 선을 그어 주셨군요.”


엘리안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길은 당신이 그렸지요.”


카일리스는 짧게 숨을 고르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이 틀리지 않도록 제가 계속 확인할게요. 이제 소전을 준비해야 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는 경례하듯 가볍게 몸을 숙이고 회랑 끝으로 사라졌다.


엘리안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정해진 선택에 새로운 길이 놓였다. 카일리스 덕분에 정해진 선택이 아닌 선을 그었다. 여사제의 무게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는 함께 나눌 사람이 생겼구나.'


평소 같으면 천천히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섰을 엘리안이 오늘은 곧장 일어섰다.

기둥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서 묘한 가벼움이 느껴졌다.

'아마 이 자리에 불리는 일은 줄어들겠지. 대신은 자신이 헤아리지 못하는 계산을 제자였던 카일리스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 다음부터는 꼭 필요할 때만 불려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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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 계시의 밤

수도원의 작은 정원 앞의 방,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다.

엘리안은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향초를 정리했다. 이제 방 안에는 울음도 한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상담은 누군가에겐 계시가 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대화였다.


오늘따라 향초의 흐름이 짙게 흩어졌고 그 흩어짐 사이로 산들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산들바람이 다가오자 불현듯 4년 전 처음 선을 그었던 날이 떠올랐다.

'이제는 예전처럼 정해진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돼. 카일리스가 길을 짊어졌고 대신은 그를 인정했어. 그가 짊어진 짐만큼 상담가의 삶을 되찾은 거야.'


지난 4년 동안 회의석에 앉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고 상담가로서의 시간은 그만큼 늘어났다.

사람들은 아이를 잃은 슬픔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 원인 모를 병과 죽음의 무게,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 등 각자의 답을 구하러 찾아왔고 엘리안은 언제나 마음을 먼저 들어주고 그들을 위한 한마디를 건넸다. 그 순간만큼은 여사제가 아닌 상담사 엘리안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일상은 여사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른 빛을 띠어갔다.


산들바람이 사라진 후 방을 정리하는데 향초의 불꽃이 혼자, 다시 살아났다.

정원에서부터 알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 문장처럼 눈앞에 보이는 듯한 경험이었다.

-“나라를 세운 자의 후손이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곧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엘리안은 눈앞에 보이는 말에 크게 흔들렸다.

'계시?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진짜 계시...'

그리고 얼마 전부터 들리던 소문이 생각났다.

'엘렉티오의 후손 카일리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과 함께 계시처럼 남아 있던 전 여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들은 것이 있어도 모든 걸 다 말할 필요는 없어. 항상 먼저 듣고 기다려. 말하는 순간만큼은 너의 선택이야.”


엘리안은 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사제로 살아온 건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지금 이 계시를 말한다면 카일리스는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되살아난 향초 불빛에 비친 모습에는 두 얼굴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눈물을 닦아주던 상담가, 다른 하나는 계시와 심판을 내리는 여사제.

그날 밤, 처음으로 두 얼굴이 명확히 갈라졌다.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 그리고 나는...'

엘리안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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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여사제 카드 - 지혜, 직관, 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원하는 방안이 없는 날에도

회랑에 앉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견디며

강요받은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던 엘리안은

카일리스의 도움으로 자신의 선을 그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순간 처음으로

말하지 않음이라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한다고 해서 내숭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숨긴다고 해서, 감춘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침묵도 하나의 행동이고 말하지 않는 것 또한 의사 표현이다.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침묵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사랑, 우정 등의 감정이 아닌 믿음, 신뢰의 부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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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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