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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마법사

황궁 밖의 재능

by 오필

석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지하 화랑.

올곧은 기둥 사이, 낡은 벽돌로 이루어진 공간. 촛불들은 깊은 숨결처럼 흔들렸다.

황궁에서 열리는 정식 왕궁 교류 모임이 끝난 후, 이곳에선 추가적인 모임이 진행됐다.

겉으로는 이 또한 왕궁 교류 모임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루카르가 비밀리에 조율해 온 연합이다.

루카르를 제외한 멤버로는 아르도라, 마로바, 테라노바, 벤토라 각각의 마을의 사절이 있다.


황제의 혈통이자 고위 성직자인 세바스티안과 전선의 지휘관인 알베르트에게 황제의 신임이 기울어가고 있다. 더구나 그 둘은 친분마저 견고했다. 황제 다음의 권력을 노리는 루카르. 그를 중심으로 권력을 쥐기 위한 사절들에겐 그 둘의 견고함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다양한 보고가 오고 간 후 자연스레 주요 안건은 세바스티안과 알베르트에게 어떻게 대적할 것인지로 이어졌다.


아르도라의 사절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성직과 혈통, 군부가 하나로 묶인 자들을 상대하려면 가문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적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마로바의 사절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의술과 주술, 기록, 설계까지 다방면으로 탁월한 재능이 있으나 고집이 세다는 평을 받는 자가 있지요. 이름은 라온델. 황궁만을 고집하는 자입니다.”

테라노바와 벤토라의 사절은 시선만 교환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라온델.

왕궁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실력이 출중해서 의뢰는 맡기지만 가문이라는 배경이 없어서 곁으로 들이지 않은 자.

그의 이름이 울리자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방 안의 공기는 미묘했다.


루카르는 그 분위기를 읽어가며 손가락 까딱였고 모든 걸 간파한 이후에야 손끝을 멈췄다. 그 순간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고집스러운 자일수록 파고들 틈은 반드시 생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후 루카르는 단 한 마디만 흘렸다. 이 말을 끝으로 오늘 연합모임은 마무리되었다.

“그 이름, 기억해 두도록 하지.”


촛불이 하나씩 꺼지며 화랑 안의 발소리는 동시에 사라졌다.


며칠 뒤 이른 아침.

외투를 바짝 여민 루카르는 홀로 황궁을 빠져나와 시장으로 향했다.

오후가 되어 시장에 다다르자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수레가 부딪치는 쇳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발자국이 뒤엉켜 공기를 가득 메웠다. 루카르는 인파의 그늘을 골라 분주히 움직였고 소란스러운 공기가 서서히 수그러들 때 즈음 어느새 공기가 묘하게 고요해지는 외곽에 다다랐다.


외곽의 허름한 목조 건물 안, 약재와 금속, 잉크 냄새가 뒤섞인 작업장의 문틈이 살짝 열려있다. 루카르는 귀족 특유의 위압을 감춘 채 문도 두드리지 않고 곧장 들어섰다. 그곳엔 어수선한 주변과 달리 한눈에 보아도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이 느껴지는 라온델이 있었다. 그의 눈빛엔 고집스러움이 묻어있다.


라온델은 문 앞의 낯선 기척부터 도면 위에 옅은 그림자까지 눈치채고 있었으나 곧장 반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을 정갈히 그은 후 잉크가 마르길 기다리듯 잠시 멈췄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침입자를 배척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질서를 완성하는 데 있었다.

루카르는 그 침묵을 유심히 지켜보며 '하던 일을 다 끝내야만 상대를 인정한다라. 확실히 스스로의 규율에 갇혀 있군. 이런 고집이야말로 틈이자 무기이다.'라고 생각했고 속으로 웃음 아닌 웃음을 삼켰다.


라온델은 펜을 내려놓은 뒤에야 고개를 들어 루카르에게 향했다.

"귀한 집안에서 오신 분이군요. 이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루카르는 미묘하게 눈썹을 올리고는 낮고 단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눈썰미가 제법일세. 그래, 나는 귀한 집안에서 왔을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 중요한 건 신분이 아니라 자네의 능력이라네.”


라온델은 손에 묻은 잉크를 천으로 닦으며 숨을 크게 들이켠 후 내쉬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능력을 논하러 오셨다면 목적이야 뻔하겠군요. 어떤 의뢰를 맡기러 오셨습니까?”


루카르는 도면을 지긋이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흘린다.

"글쎄, 의뢰라."

잠시 생각한 후 냉혹한 눈빛으로 라온델을 지긋이 바라봤다.

“다방면의 재능은 있으나, 고집이 세다는 평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라온델은 몸을 곧추세우며 또다시 숨을 크게 들이켠 후 내쉬었다.

“저를 데려가고 싶으셔서 묻는 거라면... 저는 황궁 외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왕궁이라 한들 그 정도 그늘 아래에선 움직일 마음이 없습니다.”


루카르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대꾸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후 마치 가능성을 시험하듯 물었다.

“그대는 스스로의 재능이, 황궁을 열 만큼, 견고하다고 생각하는가?”


“재능은 있습니다. 그러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재능은 결과가 증명합니다. 그러나, 때론 결과조차 재능을 증명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라온델의 대답은 단호했으나 그 말 뒤에 깃든 미묘한 떨림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답에 실린 미묘한 떨림을 루카르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무리했다.

“오늘은 그저 그대가 어떤 인물인지 보고 싶었을 뿐이네. 답은 충분히 얻었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는 잠시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언젠가 그 답을 시험할 날이 올 걸세.”

루카르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서 작업실을 나섰다.


라온델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다 다시 도면 위로 시선을 내렸다.

라온델은 루카르가 다시 올 거라고 확신했다. 이 확신은 자신의 보는 눈과 판단이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었을까? 물론 루카르는 라온델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다만 이날 루카르가 우연하게도 카일리스라는 재목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만했기에, 확신했기에 황궁의 기회는 다른 이에게 주어지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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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카드 - 잠재력, 주도성, 창조

다재다능함을 상징하는 마법사 카드는 언제나 매력적일 것이다.


라온델의 매력은 사회에 의해 빛을 잃고 말았다.

그가 황실만을 고집하고 향하고자 했던 마음은 언제 생겼을까?

자기보다 실력 없는 또래 친구들이 가문은 좋다는 이유로 하나씩 왕궁 소속이 되면서부터였을까?

아니면 또래 친구들이 왕궁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의뢰를 맡기면서부터였을까?

라온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라온델의 고집스러움을 보고 미성숙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또 그럼에도 재능에만 몰두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황궁만을 고집하며 기회를 날린 라온델을 자만했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라온델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쳐해 진 라온델이 재능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다 한들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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