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사랑을 노래하다
떠돌이 글레이먼
포르투나 엘렉티오와 멀리 떨어진 다른 대륙의 장터.
점심장이 끝난 뒤, 햇살이 따스하게 장터를 비추고 있을 무렵. 평소 이맘때쯤이면 시끌벅적하던 장터의 소음이 조금 가라앉았으나 장터의 열기를 다시 한번 뜨겁게 달구는 일이 일어났다. 그 현장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그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 한 사내가 있었다. 저울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고 귀를 기울이는 상인, 한 손으로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아이를 앞으로 밀어 자리를 잡는 아낙네, 행선지를 향해 걷다가 발걸음을 멈춘 나그네, 짐을 지고 주인을 따라다니다 함께 무리 뒤에 자리 잡은 하인 등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그 사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의 중심에는 허름한 망토와 닳은 지팡이 등 누가 봐도 초라한 떠돌이의 행색을 한 사내가 서있다. 그 사내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글레이먼이라 소개하자 모여있던 사람 모두가 웃어넘겼다. 노래만 잘 불러도, 이야기만 잘 풀어내도 귀족 못지않게 살아간다는 글레이먼이 초라한 행색을 한 채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소개하는 말에 웃지 않을 이는 없었다. 그런데 떠돌이 글레이먼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자, 음성은 장터의 소음을 가르며 퍼졌고 손끝은 허공에서 상상의 그림을 만들어내자 사람들의 반응이 금세 바뀌어가갔다.
불을 내뿜는 용에게 맞서 싸우던 왕국의 기사단들이 무너져 내리자 엘렉티오라는 평민이 신의 계시를 받아 용을 무찌르는 영웅담 펼쳤다. 이 영웅담을 하는 글레이먼의 모습은 실제 영웅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그중에는 환호하거나 감정에 복받쳐 우는 이도 보였다. 그리고 근엄한 왕과 뜻하지 않게 왕을 골려먹는 바보 하인과의 대화인, 만담 형식의 지혜담을 하면서 왕과 바보를 흉내 내자 사람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밖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직접 꾸며낸 영웅담과 지혜담까지 모든 이야기가 그의 화려한 언변 속에서 맛깔나게 흘러나왔다. 어느덧 초라한 행색을 향하던 사람들의 웃음은 온데간데없었고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장면을 만들어내는 그에게 현혹되어 빠져들었다.
그렇게 글레이먼이 영웅담부터 지혜담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웃거리며 붉은 석양과 함께 붉은 먼지가 장터의 공기를 채워갔다. 떠돌이 글레이먼은 마지막으로 저녁식사에 올라올 고기를 도둑맞아 배고픈 왕과 고기를 훔쳐먹은 것도 까먹어서 같이 배가 고픈 바보 하인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정해놓은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자 두르고 있던 허름한 망토를 바닥에 깔아놓으며 마지막까지 왕의 용모를 한 채로 바보를 흉내 내며 말했다.
"나도 슬슬 배가 고프다네.”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망토 위에 짤랑이는 동전, 굳은 빵조각, 말린 과일, 작은 치즈 조각 등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던졌다. 그렇게 자리가 마무리되며 흩어지려는 웃음과 웅성거림이 한창일 때 사람들을 붙잡는 한 마디가 군중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이보게 글레이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이 어째 사랑 이야기는 하나도 없소?”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한마디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리곤 다시 기대감을 가진 채로 떠돌이 글레이먼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이내 흩어지려던 웅성거림은 가라앉았고 다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하나 둘 입을 모았다.
“그래, 사랑 이야기!”
“용은 잡을 줄 알면서 여인의 마음 하나는 못 잡았단 말이오!.”
“왕은 바보랑만 지내다 보니 정작 사랑은 몰라봤나 보지?”
“그래, 이제 사랑을 들려주시오!”
떠돌이 글레이먼은 사람들의 외침 속에도 망토 위에 흩뿌려진 동전, 빵조각 등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기대는 묵직했다. 아이의 눈망울은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건장한 장정의 어깨는 긴장한 듯 굳어 있었으며, 아낙네는 바구니를 꼭 움켜줬다. 전부 다 거둬들인 글레이먼이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후 모두를 현혹시킬듯한 눈빛을 한 채로 지팡이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듯 휘갈겼다. 그리곤 마치 떠날 듯이 쓰고 있던 모자를 다시 한번 눌러쓰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사선으로 시선을 들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때 가라앉던 붉은 석양이 글레이먼의 뺨을 타고 내려앉자 군중의 웅성거림이 고요해졌다. 방금 전까진 웃음과 농담이 가득했으나 이제는 모두가 귀 기울여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숨이 멎을듯한 짧은 순간,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글레이먼이 시선을 바닥으로 보낸 후 상념에 잠긴 듯 입을 열었다.
“사랑이라... 용보다 크고, 왕보다 강하며, 바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이지요.”
사람들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안도감을 느끼며 잠시 뜸을 들였고 붉은 석양빛은 그를 더 화려하게 비췄다. 마치 그 화려한 석양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비추는 석양을 정면으로 바라본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후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떠돌며 길 위에서 주워 담은 가장 흔하면서도 값진 사랑 이야기가 있소.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라 하고, 어떤 이는 진짜라 말하지만 듣는 이마다 자기의 사랑을 떠올리게 될, 그런 이야기."
사랑 이야기
불같은 사랑 이야기
자유를 찾아,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난 떠돌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첫 여정길에 올라 숲을 걷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진 그에게 다가온건 낯선 숲의 축축한 공기는 불쾌함이었고, 숲을 벗어나려 했지만 발목이 퉁퉁 붓고 아파서 쉽게 걸을 수가 없었지요. 그때, 어디선가 상큼한 풀잎 냄새와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말없이 다가와 풀잎을 찧어 상처에 덧대고, 나뭇가지를 부목 삼아 묶어주더군요. 행색을 보아하니 숲에서 약초를 캐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말수는 적었으나 함께 있어주는 것, 기다려주는 법은 아는 여자였지요. 떠돌이의 발목의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곁에서 함께 기다려 주었습니다. 짧은 시간, 많은 대화는 없었으나 그 두 사람은 작은 웃음과 묘한 감정을 주고받았지요. 떠돌이가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 둘은 숲을 벗어날 때까지 함께 거닐었고 서로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그런데 행선지가 달랐던 둘은, 이내 갈림길에 이르자 안타깝게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돌이는 그 손길에서 따뜻함을 느꼈으나, 차마 따라나설 용기는 내지 못했지요. 아마,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나서 처음 맞닥뜨린 따뜻함이었기에, 그 마음이 무엇인지 헷갈려 따라나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 행선지를 향해 홀로 걸을 때면 멀리서 풀잎향기가 나는 것 같았고 아쉬움만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쉬움을 느끼며 그는 속으로 다짐했지요. ‘다음에 또 이런 따뜻함을 느낀다면, 그때는 결코 아쉬움으로만 남기지는 않으리.’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로 행선지인 마을에 도착했고 자신이 지낼 곳을 찾아 장터를 돌던 중 눈에 띄는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장터 한편에서 곡식을 팔던 여인이었는데, 그 눈빛이 누구보다도 맑았습니다. 떠돌이는 여인의 주위를 서성이며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날마다 곡식 자루를 나르고, 건장한 남성 못지않게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던 그 여인은 고된 삶을 꿋꿋이 견디는 장터의 딸이라 불리고 있었지요.
떠돌이는 그녀의 곁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장터를 떠돌며 노래를 부르며 지냈습니다. 화덕의 연기와 아낙네들의 분주한 손길, 그리고 곡식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모두가 분주했기에 떠돌이의 노래가 그녀에게 쉽게 닿지는 않았으나 포기하지 않았죠. 결국 드디어 장터의 딸과 눈이 온전히 마주치는 날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주위를 맴돌며 눈여겨보기는 했으나 그렇게 또렷하게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고 이내 숲에서의 아쉬움이 번개처럼 되살아났지요. '결코 아쉬움으로만 남기지는 않으리.' 그렇게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생겨났고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사랑의 불꽃은 이미 붙은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떠돌이는 그 뒤로 노래를 서성이며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매일 그녀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 이어서는 길 위의 풍경, 마침내 사랑의 노래까지 이어졌습니다. 장터의 딸도 처음엔 가볍게 웃으며 흘려보냈지만 반복된 그와의 만남에 어느덧 마음을 열었지요.
여인의 마음을 확인한 그날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곡식 자루 대신 달빛만 남은 곳에서 둘은 서로의 갈망을 확인했습니다. 낮에는 건실한 장터의 딸, 밤에는 사랑에 몸을 맡긴 성숙한 여인. 누구보다 맑았던 그녀의 두 눈에서는 참아온 갈망이 피어나 모든 곳으로 번졌습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치솟아 둘을 열정적으로 감쌌습니다. 그 뒤로 그녀는 하루의 고단함이 내려앉을 때면 떠돌이를 찾았고 떠돌이는 그녀를 끌어안았습니다. 서로가 감싸 안은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마을이 기대하는 장터의 딸이 아니라, 오롯이 한 남자의 여인이었습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불길은 치솟았고, 짧고 뜨거운 시간 동안 세상은 오직 두 사람만의 것이 되었지요.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현실을 무시한 채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러나 불은 오래 타지 못하는 법, 뜨거울수록 빨리 사그라드는 법이지요. 제약조차 둘을 막을 수 없었을 뿐 마을의 규칙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선 혼례를 약속하지 않은 여인에게는 밤을 허락하지 않았거든요. 참해 보인다고, 건실하다고 불리던 장터의 딸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온전히 사랑과 끌림에 몸을 맡겼으나 관계가 길어질수록 불안함이 함께 커져갔습니다. 둘의 순수한 사랑의 시작은 끌리는 그대로 불안함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둘의 불길을 욕망이라기보단 사랑이 불러낸 가장 순수한 불길이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불길.
떠돌이는 진실한 사랑을 했으나 자신이 원하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리곤 그녀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며 제약에서 벗어난 사랑이 아닌 평생을 함께할 사랑을 찾으라며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다음날 떠날 채비를 마친 떠돌이는 그녀의 손을 꼭 감쌌다가 놓고는 한마디를 남기며 떠났습니다.
“나는 길 위의 바람이라네. 당신과 함께 탔던 이 불길, 그 진심을 안고서 다시 흘러가보겠소.”
붉게 깔린 새벽안개 사이로 떠돌이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사라져 갔습니다. 그 뒤로 장터의 딸이라 불리던 여인은 떠돌이를 회상하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요. 내 마음을 훔친 떠돌이와 불처럼 사랑을 나눴고 그는 바람이 되어 떠났다고.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심이었기에, 그 불꽃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고.
창가의 여인
다시 자유를 찾아, 사랑을 찾아 떠난 떠돌이는 여러 대륙을 오가며 발길이 닿는 대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중 유난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어요. 낮이면 종소리와 함께 시장이 열리고, 저녁이 되면 촛불과 등불이 일제히 켜져 길마다 아름다운 황금빛이 흘렀습니다. 돌길 위를 오가는 마차의 바퀴소리는 선율처럼 느껴졌고, 화려한 옷차림과 허름한 행색이 뒤섞여 조화로웠죠. 특히 밤마다 성 안의 연회장에서 퍼지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흘렀지요.
떠돌이는 그곳에서 황금빛 촛불과 등불에 스며든 바람을 느끼며 노래를 지었고, 노래가 완성될 즈음부터 장터 한편에 자리를 잡아 부르곤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선율이 되어 바람을 타듯 사방으로 퍼졌고 때로는 장터의 손길을 멈추거나 지나가던 마차가 세웠지요. 듣는 순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그의 노래는 행인들의 입과 귀를 타고 성문 안으로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성 안에는 언제나 노래가 가득했지만, 떠돌이의 노래는 성안의 노래와는 전혀 달랐지요. 화려한 기교 대신 자유와 진실이 있었으니까요. 꾸밈없는 그의 노래는 성 안의 귀족의 마음도 강렬하게 흔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이가 완성된 노래를 부르던 저녁,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귀족 신사가 떠돌이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그대의 노래가 성 안을 흔들고 있구려. 오늘 밤 연회에 와서 이 노래를 다시 들려주지 않겠소?” 곧 이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던 떠돌이는 잠시 망설였으나, 신사의 정중한 청에 이끌려 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지요.
연회장은 수십 개의 촛불과 수정 등이 황금빛을 흩날렸습니다. 성 밖에서 보던 촛불과 등불이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면 성안의 촛불과 수정 등은 화려함 그 자체였어요. 은잔이 부딪히고 웃음이 터지는 화려한 자리에서 초라한 망토를 걸친 떠돌이의 행색은 더욱 눈에 띄었습니다. 아직 노래를 듣지 못한 사람 중에는 비웃음과 비아냥을 내비치기도 했죠. 그러나 정중했던 신사의 소개와 함께 떠돌이의 노래가 시작되자 연회장을 가득 매웠던 웅성거림은 곧 잠잠해졌지요. 노래는 그 어떤 궁정악단의 현악보다 깊었고 기교 대신 진심을 노래했습니다. 모두가 귀 기울이는 그 순간, 노래를 부르던 떠돌이는 창가에 선 한 여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되었어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성문 너머 세상을 본 적 없었지만, 떠돌이의 노래 속에서 처음으로 자유의 바람을 느낀 듯이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노래를 즐겼지만, 그 여인은 뭔가 달랐습니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고, 떠돌이 역시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어요. 두 사람의 인연은 그 밤, 연회의 불빛 아래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연회가 끝난 뒤, 가장 깊이 노래를 품은 이는 노래를 청했던 신사도, 떠돌이도 아닌 창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족의 딸인 그녀는 으레 그렇듯 겉으로는 규율과 사치 속의 꽃이라 불렸고 스스로는 닫힌 창문 너머를 바라만 볼뿐 날갯짓을 꿈꾸는 새장의 새에 불과했지요. 이를 알게 된 떠돌이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어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매일같이 성문 근처의 정원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마침내 여인의 산책길에 닿게 되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함께 걷던 하녀를 멈춰 세우고는 떠돌이의 앞에 섰습니다. 닿을 수 없는 창살틈 너머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마치 오래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이 긴 이야기로 이어졌어요. 그녀는 떠돌이의 입을 통해 들판과 숲, 장터의 웃음을 그려 보았는데 그 풍경은 그림 같았고, 동시에 가슴 깊이 그리던 세상이기도 했지요. 그 뒤로 그녀는 낮이면 성문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겨 떠돌이를 찾았고 연회에선 똑같이 새장의 새처럼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다만 마음의 눈길은 언제나 창밖을 더듬었지요. 성 안의 시선은 언제나 엄중했으나, 둘의 시선이 마주칠 때만큼은 어떤 규율도 닿을 수 없었지요.
떠돌이는 정중한 신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노래라 생각하며 떠날 채비를 했던 것은 까맣게 잊었지요. 그리고 그녀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신사의 초대에 몇 번을 더 응했습니다. 떠돌이의 노래는 이제 길손을 위한 노래가 아니었고, 그녀의 미소는 더 이상 억눌린 규율의 장식이 아니었지요.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병풍이 되어 서로에게만 향한 목소리, 서로를 위한 자유가 펼쳐졌으니까요.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 관계는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떠돌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약속 위에 서 있었어요. 귀족의 딸로서 다른 집안과의 혼례가 기다리던 몸이었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혼례의 날이 급격히 다가왔고, 가문 간의 약속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떠돌이에게 말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눈물을 쏟아냈어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세상에서 가장 밝게 웃으며 “당신이 보여준 바람, 그 자유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라며 속삭였지요. 떠돌이는 그녀의 속삭임을 들으며 묵묵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놓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나는 길 위의 바람이랍니다. 그대의 눈빛 속에서 본 자유, 함께 꿈꾸던 순간은 바람을 타고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이별 속에 다가온 새벽, 성벽 위 붉은빛이 번지는 시간. 이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촛불도 등불도 켜지기 전, 떠돌이는 바람이 된 듯 사라져 갔습니다.
그 뒤로 창가의 여인은 가끔씩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가 자유를 사랑했다면 연회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내가 사랑한 것이 그 사람이었다면, 자유가 아닌 그 자체를 붙잡았을 테니 귀족의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고.
자유의 여인
다시 자유를 찾아, 그리고 사랑을 찾아 길을 떠돌던 떠돌이는 이번엔 광활한 사막을 지나던 중 한 오아시스 마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낮이면 뜨겁게 타오르는 모래 위로 신기루가 일렁이고, 해가 지면 거대한 야자수와 샘이 고단한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었지요. 그곳은 사막의 교차로였으며 상인과 나그네, 순례자와 예술가가 모여드는 곳이었답니다. 천막 사이에서는 이국의 언어가 얽혀 흘렀고, 밤이면 불빛 아래 춤과 노래, 흥정과 웃음이 오아시스를 가득 메웠어요. 그곳에서 떠돌이는 자기와 유사한 자유로운 눈빛의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대상단과 함께 머물다 떠나는 순례자의 딸이었으니, 이 마을에 오랫동안 머물 이는 아니었지요. 대상단이 처음 마을에 도착한 날, 모두가 긴 여정에 지쳐 있었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사막의 별빛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더군요. 그뿐 아니라 오아시스 마을 안의 모든 남정네들을 홀릴만한 다양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죠. 떠돌이는 경쟁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다가가기보단 평소와 같이 노래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들으며 흥겹게 춤을 추거나 박수를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채 떠돌이를 바라보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였어요. 아마 떠돌이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자신과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으나 서로를 알아본 것이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그날 이후 밤마다 오아시스의 샘가에서 마주했습니다. 그녀는 낮에는 무리에 묶여 있었지만, 밤이 오면 떠돌이와 함께 모래 위에 등을 기대어 별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녀는 길 위에서 마주한 사막의 고독을 이야기했고, 떠돌이는 대륙 곳곳의 바람을 노래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파도처럼 거대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다시금 잔잔해지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흘러갔어요. 둘의 관계는 불길처럼 치솟지도 않았고,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함께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곁에 머무는 그 순간만큼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사랑이었지요. 그리고 떠돌이는 처음으로 잔잔한 사랑을 나누면서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자유와 사랑은 서로를 해치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음을, 잡을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답고, 떠남 속에서도 마음에 남는 사랑이 있음을.
머지않아 정비가 끝난 그녀가 속한 대상단은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녀가 낙타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샘가에 선 떠돌이를 바라보았지요. 입술은 움직이지 않은 채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둘은 눈빛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떠돌이는 뒤돌아 떠나는 그녀를 보며 낮게 속삭였습니다. “그대와 나눈 밤하늘의 별빛 속, 함께 거닐던 세상을 길 위 어디서든 꼭 간직하리다.” 이윽고 대상단은 먼 사막으로 사라졌고 오아시스는 잠시 고요해졌어요. 아니 마을은 그대로였으나 떠돌이의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떠돌이는 모래바람이 일고, 야자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지팡이를 짚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처음 자유를 찾아 헤매기 전, 그곳에도 사랑이 있었구나.' 잔잔한 사랑의 감정이 지나감을 느끼며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펴낸 그는 더 이상 자유를 핑계로 도망치는 떠돌이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품은 채 진정한 자유를 향해 자신의 길을 나아가기로 했지요. 이 카일리스라는 떠돌이는 떠돌이 생활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자신이 나고 자랐던 대륙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더군요.
떠나는 글레이먼
글레이먼은 사랑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떠날 채비를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 그가 사라져 갈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섰던 카일리스는 오히려 자유가 없는 세계, 모든 곳이 포르투나 엘렉티오만큼 자유롭지 않음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도중 함께 밥을 나누고 일을 거들며 무리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자 그 속에서 자유를 찾았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규율과 금기에 갇혔었음에도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 억압된 일상 밑바닥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품고 있었다. 때로는 혼자 품기도 하고 때로는 나누기도 하는 사랑은, 일상의 틈에서 몰래 눈빛을 주거나 은밀히 손을 잡으며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사랑마저 규율로 억압된 곳일지라도 사랑은 규율을 깰 정도로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자유를 찾아 떠난 카일리스는 주인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사랑조차 할 수 없는 하인과의 사랑부터 정략결혼에 묶여있는 귀족과의 사랑까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눴다. 떠돌이 글레이먼이 되어 많은 사랑을 나눈 그는 속살의 삶을 함께 겪으며 진짜 자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랑은 어디에서든 틈을 찾아 자라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작은 틈에서 피어난 사랑이야말로 가장 순수했으며 자신이 자유를 찾아 떠난 것은 이 틈을 경험하기 위함이라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떠돌이 글레이먼을 회상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는 아직도 세상을 떠돌며 자유와 사랑을 찾아 노래한다고.
연인 카드 - 사랑, 관계, 끌림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은 자유처럼 시작된다.
때론 혼자만의 짝사랑이 되기도, 헤어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와는 별개로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자유롭다.
자유를 찾아 떠난 카일리스는 자유가 없는 환경에서, 자유를 느끼기 위해,
관계가 형성되지 않더라도 나눌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랑을 하기로 택했다.
그리고 먼 길을 되돌아 다시 이전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미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 넘어 언저리에 있는 그곳을 향한 첫걸음부터,
이 사랑이 혼자만의 짝사랑이 되더라도 자유를 택했기에 일말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만약 그녀를 다시 찾아가 사랑의 틈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새로운 자유를 찾아 떠도는 떠돌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