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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귀촌생활의 시작

무모한 선택으로 찾은 새로운 인생

귀촌을 결심한 지 6개월, 그리고 준비 과정 4개월 만에 드디어 이사 날짜를 확정했다. 단순히 도시를 떠나는 것을 넘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는 인생의 중대한 기점이었다.

임시 거처로 정한 원룸은 도배와 장판 대신 간단한 페인트칠과 청소만으로 준비를 마쳤고, 보일러 기름도 넉넉히 채웠다. 최소한의 준비였지만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으니 추위와 불편함을 최대한 줄여보고 싶었다. 카페와 공방을 함께 운영할 가게 계약은 일찌감치 끝냈고, 짐을 보관할 옥상 공간까지 확보했다. 집 매매는 시간이 걸릴 듯하여 우선 아파트 전세 계약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처럼 설렘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양가 부모님께 도시를 떠나 귀촌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떨리고 죄송스러운 마음이었지만,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 형제들의 염려는 모두 뒤로했다. 평생을 살면서 부모나 형제, 친구들의 영향력 없이 오직 우리 둘만의 의지로 고민하고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 경험해보지 않은 귀촌에 대해 자신들의 걱정을 담아 쏟아내는 정보들을 일일이 처리하다가는 우리의 의지가 꺾이고, 결국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을 살게 될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감과 직관을 믿고 싶었다.

대부분의 염려는 예상대로 비슷했다. 평생 도시에서만 살았던 내가 시골 정서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답답함과 지루함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하는 걱정, 시골로 내려가기에는 아직 젊다는 의견, 부모님 연세도 있으신데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내려가도 늦지 않다는 조언까지 들었다. 이 모든 걱정 속에는 진심 어린 마음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익숙함에 대한 미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부분의 염려는 우리 부부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우리 부부의 부재로 인해 생길 변화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런 모두의 염려를 뒤로하고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짐 속에는 10년 넘게 쌓아온 도시 생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삿짐 싸기


귀촌은 말이 통하는 이민과도 같았다. 온전히 모든 것이 갖춰진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임시 거처를 구하고 떠나는 이삿짐이라 포장이사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든 짐을 세 가지로 분류하는 라벨 작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짐들을 마주하며 무엇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렬하는 시간이었다.

당장 내려가자마자 써야 하는 짐: 이불, 옷, 최소한의 주방용품 등

가게와 공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짐: 작업 도구, 재료, 공방물건 등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에 풀어도 되는 짐: 추억이 담긴 물건, 계절 용품 등


필요 없는 짐을 버리고 분류된 짐에 라벨 작업을 하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온몸이 쑤시고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새 출발을 위한 통과의례라 생각하며 묵묵히 해냈다. 먼 길을 와야 하기에 짐은 이사 전날 트럭에 실어 먼저 보내고, 우리는 어둠을 뚫고 강아지 두 마리를 무릎에 앉힌 채 구례로 출발했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며 당장 들어가 누울 이불 보따리만 싣고 떠나는 모습은 마치 쫄딱 망해 야반도주하는 모양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과 함께 새로운 시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의 삶에 신의 한 수가 될지, 아니면 최악의 선택이 될지는 그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회 없이 뛰어들고 싶었다.



귀촌 생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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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이사가 끝났다.

짐 정리는 하다 팽개치고

바람 쐬러 가는 중…

섬진강을 지나간다.

앞으로의 삶에서

미망 속을 헤맬 때

중심을 잡아줄…

그 자연 속에… 내가 있다.” 2014년 1월 10일 이사 다음 날

내 공방 장비와 남편의 전기 작업 장비, 그리고 30평 아파트의 모든 짐을 정리하고 왔음에도, 6톤 트럭으로 짐을 내리고 나니 남편은 결국 몸살이 났다. 낯선 시골집, 짐들 사이에 무작정 누워 앓고 있는 남편을 두고 홀로 뒷정리를 하다 늦은 오후, 잠시 길을 나섰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섬진강은 마치 우리의 힘든 마음을 위로하는 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어디에 살든 인생이 늘 핑크빛이기만 할 리 없다. 때로는 평온할 것이고, 때로는 혼돈 속에서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걷다 보면 다시 나로 돌아와 묵묵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자연이 주는 위로와 회복의 힘을 그 순간 온몸으로 느꼈다.

집 안에서도 플리스 재킷은 기본이고, 코와 얼굴은 마치 술 한잔 마신 듯 불그스레하며,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오는 외풍 심한 시골집. 온돌방의 따뜻함에 익숙했던 우리에게는 낯선 추위였다.

밥을 먹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추위와 피곤함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이라는 걸 했으면 못 내려왔지! 무모하긴 했다, 그치? 크크크”

ISTJ 남편과 INTP 아내의 선택에는 즉흥성이란 없다. 계획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의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그런데 우리의 결혼 생활에 가장 중요했던 선택들은 늘 무모했다. 만난 지 99일째 되는 날 결혼을 하고, 귀촌을 결정한 지 6개월 만에 도시 생활을 접고 짐을 싸 들고 내려오는 무모함. 주변의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오직 우리 둘의 믿음으로 이뤄낸 선택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고 결정했던 어떤 일보다 직관적으로 과감하게 선택한 일의 결과가 우리의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때의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무모한 선택이 어느새 12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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