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도망가지 않고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by 소도

내 도망 선언에 언니가 미안하다고 하지만 도망은 안된다고 해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에도 사과를 하며 나를 잡아주어서 고마웠다. 엄마를 투병하는 동안 내가 엄마 옆에 가장 오래 있었을지는 몰라도, 드러내지 않고 사실은 언니가 그 모든 과정을 이끌어 왔다. 첫째로서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어떻게 보면 가장 강했던 언니는 엄마와의 이별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티 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꺼이 우리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 우리 가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포기라는 것이 언니의 선택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마 나와 언니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언니는 늘 인생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날까 봐 떨고 있는 비밀을 유일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럴 때면 같이 빠져갈 궁리를 해주었고, 내가 사고 싶은 시계가 내 용돈보다 훨씬 비싸다는 걸 알고 자기 용돈을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주는 사람. 대학교 때 터키로 여행 갔는데 (아직 종이비행기표가 필요하던 그 시절)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잃어버리고서 패닉이었던 내가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언니였고, 언니는 막 울면서 항공사에 전화해서 사방팔방으로 방법을 찾아보고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일도 있었다. 내가 미국인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와 사귈 때 과연 그와 나의 세계와, 우리 가족의 세계에는 접점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할 때 언니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서 아는 영어를 모두 동원해서 환영받는다는 따뜻한 느낌을 주어서 우리의 걱정을 다 날려버려주기도 했다. 대학교 때 교환학생 합격하고서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게 부담스러워서 갈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할 때도 ‘천만 원이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나중에 네가 더 커서 돌아보면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보다는 적은 액수라고 생각할 날이 올 거야'라며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할 수 있게 용기를 준 사람.


그래서 나는 언니가 결혼할 때 상당히 큰 상실감을 느꼈다. 온전히 언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우리'에서 언니가 내가 모르는 세계로 편입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만들었다. 가족의 확장이면서 한편으로는 한 발자국 멀어진 우리. 그래서 이번에 그렇게 부대끼고 같이 보낸 시간이 중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아갔다. 형부는 (조금 투덜대지만)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것, 너무 예쁜 두 명의 조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조금 더 많게 됐고, 잘 놀아주는 인기 있는 이모가 되어서 좋았다. (이모부를 더 좋아하는 게 함정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랬듯 언제까지나 언니는 나에게 뭔가 마음이 쓰이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도 언니가 보내주는 근황 사진을 보면 사랑스러운 내 조카들의 행복한 엄마의 얼굴도 보이지만, 나에게는 엄마를 잃은 아이 같은 언니의 얼굴이 먼저 보여서 마음이 아린 것처럼.


우리 셋 중에서 남동생이 엄마와 제일 가까웠는데 동생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스타일이라 엄마랑 성향이 잘 맞았다. 엄마가 하자는 데로 잘 따르고, 그리고 조곤조곤 엄마한테 근황 이야기도 잘하고 그랬다. 동생과 전화를 할 때면 엄마의 얼굴이 완전한 행복감에 쌓이는 걸 보고, 언니와 나는 맨날 동생이 엄마의 ‘최애'라고 질투하는 척하며 엄마를 놀리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그런 게 어디 있겠냐고, 엄마는 동등하게 모두를 사랑해라고 하셨지만. 언니랑 나는 정말로 질투의 감정이 아니라, 엄마에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진심으로 좋았다. 동생이 잠도 못 자가면서 대학원과 연구원 생활을 병행하고, 거기에 취업 준비까지 하느라 인생에서 전력을 다 해야 하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엄마에게 스윗한 아들이 되어줘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내가 우울한 시기를 보낼 때도 내 방에 와서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늙은 누나가 잘 못하는 인터넷 쇼핑도 도와주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은근하게 나를 위로하려 했던 마음을 안다. 그렇게 재밌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기분이 한층 나아지곤 했다.


동생을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선다. 언니와 나와 각각 열 살, 여덟 살 차이가 나다 보니 자랄 때부터 늘 좀 거리가 있었다. 착하고 유한 성격이라 드센 누나들 사이에서 징글징글했을 거다. 한 가지 부러운 점은 엄마가 의욕적으로 (=스파르타식으로) 우리를 키웠던 것과는 달리, 동생은 그냥 물 흐르듯 지켜보며 키웠는데 그게 좋았을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엄마와의 사이가 우리보다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언니랑 나와는 달리 동생은 부모님이 인생의 황혼기에 조금 더 가까워 왔을 때 커와서 알게 모르게 부모님에게 마음껏 기대기가 쉽지 않은, 그런 마음의 짐이 있었을 것이다. 동생이 재수를 할 때, 서울에서 언니랑 한집에 살았다. 그때 문제집 사고, 옷 사는데 쓰는 돈의 영수증을 차곡차곡 모아둔 통을 보게 됐는데, 동생이 ‘이거 다 나중에 엄마 아빠한테 갚아드릴 거야’ 했다고 했다. 언니랑 둘이서 그 이야기하면서 동생이 짠해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동생에게 엄마는 인생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고,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 텐데, 그런 엄마를 잃은 동생이 많이 걱정 됐다. 투병 중의 엄마도 동생 걱정을 제일 많이 했다. 하지만 늘 어리다고 생각했던 동생을 이번에 달리 보게 된 순간도 많았다. 우리의 경험에 대해서 성숙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내가 흔들릴 때 위로해주고 기댈 수 있게도 되었다. 일본에서 사회 초년생의 삶을 사느라 바쁘지만, 옷장에 엄마 사진을 붙여두고 매일 엄마를 생각한다고 한다. 괜스레 눈물 나게 하는 아픈 손가락인 동생이 이 누나는 자주 보고 싶지만, 시크해서 카톡 답장도 기본 5시간 정도 이후에 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는 꽤나 인내심을 요한다. 아주 작은 바람이 있다면 동생이 앞으로 크고 작은 인생의 시련 앞에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한번 덜 고민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밀어주면 좋겠다.


부딪혔던 많은 순간만큼, 아빠를 이해하게 된 순간도 많았다. 엄마가 아프기 전, 아빠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집안의 주도권을 혼자서 모두 갖고 있고, 엄마는 늘 아빠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집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폭력적인 독재자로 군림했기에 엄마와 우리는 늘 아빠가 무서웠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아빠는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투병기간 동안 아빠는 엄마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기본적으로 청소와 장보기와 같은 집안일을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세세하게 엄마의 약 챙기는 일도 꼼꼼한 아빠가 도맡아 했다. 특히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엄마가 아파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고 끙끙 앓았던 적이 많았는데, 그 잠 많은 아빠가 한 번도 그 소리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깨서 엄마를 다독이다가 새벽 녁에나 잠들곤 했다. 내가 옆에 있을 때도 많았지만, 결국엔 아빠가 남편으로서 메인 보호자의 역할을 했기에 우리 중에 아빠의 어깨에 가장 무거운 무게가 내려앉아있었을 것이다.


평생을 함께해 온 파트너를 잃는다는 것은, 특히나 한국의 아빠들처럼 삶을 운영하는 일을 거의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경우, 배우자를 잃는다는 상실감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늘 날카롭고 또렷했던 아빠가 엄마의 투병기간을 거치며 기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작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정말 절망적이라는 것, 그래서 아빠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많이 짠했다. 어느 날 문득 아빠를 봤는데,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세고, 주름이 많이 늘어있었다. 가혹했던 일 년의 시간이 아빠의 얼굴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특히나 이 모든 과정을 우리 셋과 소통하지 못하고 아빠는 힘듦과 상실감을 혼자서 삼켰을 것이다.


아빠가 진심으로 그동안 좋은 배우자가 아니었던 걸 엄마에게 미안해했다. 그래서 아빠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정성을 다해 엄마를 돌보았고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우리 자식들과의 관계마저 단숨에 가깝게 해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토라지고 화가 나는 앞으로의 많은 날들 중에 몇 번쯤은 솟구치는 화를 멈추고, 아빠를 좀 더 이해하려고 해 볼 것 같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아주 조금 여유를 갖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끊임없는 도전을 받은 우리 가족의 관계는 예전보다 아주 조금은 더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애틋하고 다정하진 않았지만 우린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고, 서로 조금 더 알아갔으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런 관계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만을 이상적으로 보는 우리 사회가 화목한 가족의 모습에서 조금 벗어난 대부분의 사람들을 더 외롭고 결핍을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좀 모나고 단정하지 않은 모습이라도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좀 뒤죽박죽이지만, 전형적인 화목한 가족의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각자의 최선으로, 결국 도망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이 경험을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도 우리는 관계에 대한 도전을 받으며 도망을 계획하다가 또 화해하고 함께 걸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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