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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pr 26. 2023

나폴리, 우아하게 혼란스러운 도시


모든 것은 이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집에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마르코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동네를 알아가지 않았더라면, 이 도시에 대한 내 경험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내렸을 때, 방콕을 닮은 혼잡스러운 도시가 나폴리의 첫인상이었다. 거칠게 달리는 차들, 오래되고 낡은 빌딩, 내용물이 넘쳐흐르는 쓰레기통,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야를 가리는 전선줄들, 권태로운 얼굴의 길거리 상인들과 세련된 메트로폴리탄 보행자들의 대비. 우리가 흔히 이탈리아에서 기대하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래서 로맨틱한 이탈리아를 생각하는 여행자들은 나폴리에 도착해서 깜짝 놀란다. 거칠고, 혼잡하고, 지저분한 모습을 보고는 그저 나폴리 피자를 먹고, 얼른 폼페이로 넘어가는 식이다. 3년 전의 나 역시 그랬다.


그랬던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끈 건 HBO 드라마 <나의 눈부신 친구>넷플릭스 영화 <신의 손>이었다.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본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1950년대의 나폴리를 사는 두 소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엘레나에게 나폴리는 무질서 속에 폭력이 도시를 움직이는 곳이고, 집안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에 숨이 막히는, 그래서 도망치고 싶은 곳이다. 반대로 넷플릭스 영화 <신의 손>에서 그려지는 나폴리는 생기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이다. 이 영화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중상층 인텔리들이 사는 동네에서 자란 그에게 나폴리는 여유롭고, 예술적 영감이 넘치는 곳이다(그는 실제로 내가 머물고 있는 동네 보메로 Vomero에서 살았다고 한다.)


서로 다른 느낌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 두 작품을 보고 나서, 자꾸만 나폴리가 생각났다. 무엇이 이렇게도 나를 끌어당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주인은 지하철 역에서 내려 10분이라고 했는데, 그 10분이 가파른 언덕이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20도의 서늘한 날씨에도 등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복잡한 지하철 역에서 벗어나 낑낑대며 짐을 끌고 올라가면서, 복잡함은 점차 한산함으로 바뀌고, 난잡했던 가게들 대신 우아한 편집샵과 고급스러운 헤어샵이 나타났다.


에어비앤비를 예약하고 나서, 우리에게 집으로 오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마르코였다. 그와는 아파트 로비에서 만났다. 멀끔하게 키가 크고, 청바지에 연하늘색 폴로셔츠, 빛바랜 멋스러운 가죽자켓을 입고 있는 남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이탈리아인의 액센트가 묻어나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얇은 은테를 쓴 그의 옆모습에는 마치 학자 같은 스마트함이 비쳤다.


우리가 머물 집은 6층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집 내부에 한번 놀라고, 널찍한 발코니로 나갔을 때 나폴리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뷰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우와, 이런 집을 갖고 있다니, 너무 부러워요!!” 라며 감동하는 나에게, 그는 “I wish! 근데 나는 이 집주인이 아니에요. 집주인 대신 에어비앤비를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에요.”라고 했다. 집주인은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그녀는 나폴리에 총 세 채의 집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대신해서 투숙객들의 체크인을 관리한다고 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여기와 매우 다르다고. 그 차이는 그저 부촌과 서민동네의 느낌을 넘어서 마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상 같다고 했다. "우선" 하고 운을 띄우더니, "우리는 나폴리탄(나폴리 언어)을 쓰고, 여기서는 이탈리아어를 써요."라고 했다. 나폴리탄은 단지 억양이 다른 방언이 아니라, 그가 들어준 예를 보면 상당히 다른 언어처럼 들렸다.


“나는 나폴리탄과 이탈리아어 둘 다 할 줄 알지만, 우리 동네엔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반면에 지금 이 아파트가 있는 동네, 보메로의 사람들은 나폴리탄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같은 단어라도 발음이 많이 다르거든요.” 여기서 15분이면 닿는 완전히 다른 세계, 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그는 내가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오면서 본 낡고 허름한 건물이 모인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 지어진 탓에 하루에 해가 들어오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창문마다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있고, 아줌마들이 좁은 발코니에 서서 옆집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런 동네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길거리 상인들에게서 무언가를 살 때 줄을 매단 바구니를 쓴다고 했다. 예를 들면, 4층의 아줌마가 길에 있는 과일 카트 아저씨에게 오렌지 1키로를 사겠다고 소리를 치고, 2유로가 든 바구니를 내려 보내면 그 바구니로 오렌지를 받는 식이다. 세상은 변하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그런 세상인 것 같았다.



하나의 도시 안에 있는 두 개의 세상. 그게 시작이었다. 이 도시가 갖고 있는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알게 되면서 이 도시만의 독특한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폴리에만 4일을 머물렀다. 고풍스러운 헌책방 거리를 누비고, 친절하고 인심 좋은 델리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단골로 보이는 가게 손님들이 열정적으로 메뉴 추천을 해주었다!), 로컬들만 가는 동네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코르네또로 아침을 시작했다.


길에서, 상점에서, 공원에서, 카페에서 만난 나폴리 사람들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태도가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누추한 현실에도 기죽지 않은 기개,랄까. 한때 유럽 모두가 부러워한 부와 풍요로운 문화를 가졌던 나폴리 왕국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19세기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로마나 밀라노에 비해 발전되지 못한, 정치적/지정학적 상황에 분노하지만(로마 정부를 비난하는 그라피티가 길거리 곳곳에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고고한 태도는 마치 '나는 가난으로 나를 정의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천성이 쾌활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만난 마르코처럼 안정된 직업은 없지만 문화 수준이 높고, 세련된 사람들이 보였다. 생활의 제약에 찌들지 않은 그런 태도가 우아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이 도시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상반된 모습 안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 한껏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모습도, 허름한 건물 사이에 지저분한 거리도, 들여다보면 도시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나폴리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딱 다섯 가지라고 한다 - 종교, 가족, 태양, 바다, 그리고 축구. 카르페 디엠이 DNA에 새겨진 것 같은 명쾌한 답이다. 이 도시의 매력을 더 알아가가고 싶어서 다음엔 한 달쯤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폴리 사람들의 사이에 부대껴 살아보면, 그들처럼 삶의 기개를 갖고 멋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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