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워킹홀리데이 - 흔들린 그날
혼자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던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다.
보통 학생들이라면 방부터 구하고 면접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찾았겠지만, 나는 조금 더 안정적인 방법을 골랐다. 유학원을 통해 전화 면접을 보고 합격해, 기숙사가 있는 호텔 인턴으로 시작한 것이다.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숙식이 제공돼 돈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매일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호텔 직원은 일본인과 외국인이 절반씩이었다.
외국인은 주로 한국, 대만, 몽골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남자들은 ‘바이킹구’라 불리는 뷔페에서, 여자들은 뷔페나 프런트에서 일했는데 나는 프런트에 배치되었다. 손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아 회화 실력이 빠르게 늘었고, 전화 예약을 받으며 손님 이름으로 한자까지 익힐 수 있었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 웃지 못할 실수도 많았지만, 동료들은 대체로 상냥했다.
프런트 앞에 펼쳐진 바다는 매일 봐도 좋았다.
친구도 사귀고, 휴무일에는 근처 미술관이나 스키장을 즐기며, 완벽한 해외생활의 꿈을 이루는 듯했다.
교육회사 팀장님이 하신 말처럼 ‘월급값 하는 직원’이 되기 위해 부족한 점을 찾아 고치려 노력했다.
덕분에 일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워킹홀리데이가 끝나도 취업비자로 남아 달라는 제안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생활은 내게 잘 맞았다.
속은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친절했고, 남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마저 쿨하게 느껴졌다.
당시 환율도 좋아서 원화로 환산하면 생각보다 급여가 괜찮았고, 물가는 저렴했으며 겨울도 한국만큼 춥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먼 미래까지도 그려봤다.
세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잠깐 졸았나?’
눈앞에서 프런트 데스크가 휘청이며 기울었다.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방파제 너머 파도가 눈에 보인 건 처음이었다.
나는 놀라 그대로 굳어 있었는데, 휴무였던 룸메이트 언니가 내 여권을 챙겨 프런트로 달려왔다.
“도망가야 해!”
언니 말로는 방 안의 거울이 떨어지고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고 했다.
일본인 직원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태연하게 말했다.
“별일 아니야. 지진은 흔해.”
정말 이 정도가 흔한 걸까? 처음 겪는 나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다음 날은 휴무였다. 한국은 난리였고 가족들은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
일본 뉴스는 큰일 아니라는 듯 보도했지만, 오다이바에 있던 친구는 직접 불길을 봤다고 했다.
지진만이었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방사능’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퍼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나니, 마음은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귀국 의사를 밝히자, 그동안 상냥했던 직원들이 말했다.
“호들갑 떤다.”
“이래서 한국인들은 안 돼.”
당황스럽고 분했지만, 실제로 귀국한 건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아쉬움이 크다.
처음 타본 전기자전거, 1월에 피는 벚꽃, 바다 위에 걸린 무지개, 수요일마다 사 먹던 100엔짜리 치즈케이크까지.
소중한 기억들을 정리할 새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일본어 쓸 기회는 줄었고, 두 번의 휴학으로 졸업은 늦어졌으며, 취업은 더 힘들어졌다.
어디서부터 후회해야 할까.
늦게 전과한 것?
교육회사에 남지 않은 것?
지진 때문에 돌아온 것?
100일 남짓한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일본에서 살았었지, 일했었지.’
그래서일까. 일본은 나에게 영원히 아쉬움이다.
그래도 지금 내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는 무용담처럼 사람들과 대화할 때 좋은 아이스브레이킹 소재가 된다. 그걸로 충분한 걸까.
일본어를 쓰며 살고 싶었던 나는 승무원을 떠올렸다.
남은 학기를 마무리하며 여러 번 면접을 봤고, 한 항공사에서는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딱 3학점이 모자라 졸업이 미뤄지면서 결국 탈락했다.
그렇게 꿈도 없이 졸업장을 받았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현실은 따가웠다.
‘나 잘 살 수 있을까?’
끝내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