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도 없이 아주 화창하게 맑은 오후, 서녘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우연히 내 시야에 걸린다. 친히 땅바닥까지 내려와 내 시선에 끼어들어 그 창 같은 햇빛을 모조리 쏟아내고는 지구 반대편의 아침으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덕분에 내 표정은 눈가를 기준으로 오므라들고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더 꼴사나워진다. 내 눈동자로 쳐들어오는 속도가 딱 그의 빛의 속도와 같아 내가 들고양이마냥 아무리 재빨리 고개를 돌려도 도무지 내 깜냥으로는 피하기엔 공력이 모자란다. 애초에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재고해보지만 ‘지는 해’나 ‘노을’, ‘석양’ 따위가 가지는 그 낭만에 아니 이끌릴 수가 없었음을 안다. 결국, 인간으로서 가지는 재주의 한계와 낭만을 찾는 제 버릇에 나는 결국 눈동자에 벌건 주황색 그리고 분홍색이 얼핏 섞인 얼룩같은 자국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짧지만, 뻥 뚫린 구멍 같은 것이 참 신경쓰인다.
그리움은 그렇게 이끌리듯 온다. 그리움은 눈동자에 남는 벌건 흔적처럼 다가오는 것과 같았다. 삶의 어느 날에 문득문득 끼어들며 신경을 거슬리게하고 언젠가부터는 옅은 미소로 반기게 되는 기분좋은 비 비린내와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사실이 풀썩, 거짓이 되어버렸다.
그리움은 그렇게 이끌리듯 왔고, 갔다. 잠깐의 벌건 흔적만을 남기고 저 다른 하늘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움의 오후 속에서 나는 아직도 지팡이를 놓친 장님의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었고, 아직도 지혜롭지 못한 미련에 죄수의 마음으로 얽매여있었고, 그렇게 아직도 이별하는 중이었고, 아직도 사랑하는 중이었다. 이제 가위에 눌린 아이처럼, 이제야 나는 끝을 내려고 발버둥친다.
혹시나 너가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하는 착각을 지워내었고, 이젠 없는 너의 눈치를 보는 일도 그만두기로 했고, 우리 인연이 어느 지점에서 끝이 났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너를 내려놓았다. 어딘가 쯤에서, 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꺼야. 우리는 서로 나눴던 공간과 시간과 대화와 몸짓과 인사와 말투를 다른 사람으로, 어쩌면 까맣게, 덧칠할 것이다. 아마 조그만 흔적정도는 남을지도 몰라, 붓질 한번 같은 추억에도 이내 곧 덮여지겠지만.
수평선으로 해가 넘어간다. 주황빛 노을이 마음을 부술 듯 눈가에 들이치다 일순간에 그 동그라미 빛의 마지막 조각을 잃는다. 오전 오후 내내 머리 위에서 하얀 빛을, 그리고 종종 검은 그늘을 내어주던 동그란 태양이 이제서야 차가운 바다로 사라지는 것. 나는, 눈을 껌뻑인다. 그리고 끝으로 가는 것이다, 어쩌면 긴 하루가. 조금 섭섭한 마음 쯤은 달빛이 어느정도 위로가 되어주겠지.
끝을 향해 가며, 달에게 빌 듯 이제 너에게 바란다. 너는 나를 진작에 흘려보냈겠지만 나는 너를 이제서야 흘려보냄이 너에게 어떤 기쁨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너는 누군가에게 어릴 적 사진처럼, 꽤 오래 남아있었고 깊게 남아있었을만큼 스스로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나하고보다 더 이쁜 사랑을 하고, 꽃이 꺾이는 일처럼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바라. 우린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좋은 인연이었다고 믿기로. 이 믿음으로, 어떤 소식이나 우연한 마주침 없이, 이렇게 끝이 나는거야.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언제나, 인연이나 이별이나 결국 다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내 일년 간의 이별이 끝이 났다. 나와 너에게 너와 나는 이제, ‘이전의 것’일 뿐이다. 남는 것은 가끔씩 이끌리듯 오고 갈 몇 분간의 그리움와 이어지는 몇 초간의 여린 증오와 나열할 수 없는 미화된 기억들 정도일 것이다. 아무리 끝이 났다고 다짐해도 버텨야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겠지. 하지만 언젠가 끝이 나는 일임을 안다. 끝이 날 일은 끝이 날 것이다. 더 이상 그리워할 일 없이 옅은 기억으로 널 지나칠 때까지, 할 일이 참 많겠다.
아직 가시지 않은 온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달빛이 찬란하고 밤공기가 편지처럼 다가온다. 곧 반딧불이가 어정어정 노량으로 나다닐 것이다. 하루에 지쳤을 반딧불이와 함께 알아차린다. 달빛과 견뎌야할 길고 긴 밤이 남아있더라도, 끝이 날 일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