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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25. 2021

그들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정신질환

자기 집 벽지 색깔 같은 미래에 겁먹은 불우한 아이들, 지금까지의 삶의 시간에 배신당하고 가난에 주름진 노인들, 사회에서 버려진 것인지 스스로를 버린 것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노숙자들, 하루가 멀다하고 술 취해 거리에 키스하는 주취자들, 분노를 핑계삼는 폭력배들, 거짓말쟁이 사기꾼들과 그에 속은 피해자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절도, 시비 그리고 종종 노상방뇨까지. 경찰일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


그리고 소위 정신병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많다.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자기 동네에 얼마나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살고 있는지. 나도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우리 동네가 정말 아름다워보였었다. 하지만 양지로 보이는 어딘가에 음지가 있기 마련이다.


소리지르고 깨부수고 저항하고 날뛰고. 정신병자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게 내가 가진 편견이자 그들에 대한 정해진 결론이었다.


내가 만났던 정신질환자들은 사실 그런 식이었다. 세상의 악독함을 잔뜩 구겨서 만든 사람들.  내가 그들을 격리시키고 응급입원 시킬 때면, 이 사회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동네 사람 몇은 내가 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공의 안녕 따위를 생각하면서 정의를 지켰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은 종종 누군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었기에 어쩌면 경찰의 도움이 스스로도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경찰이 처리해야할 '사건' 중 하나.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이 어떤 질환을 갖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내게 줄곧 처리대상일 뿐이었다. 119불러서 구급차에 실어서는 정신병원으로 데려갈 사람들. 이때 정신병원은 내게 '병원'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멋모르던 실습생 때 정신질환자들에게 시달린 기억에 여전히 그들은 내게 기피대상이었다. '아픈 사람들이잖아' 따위의 멋드러지는 감상은 없었다. 아픈게 핑계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여학생을 만났다.


부모에게 온갖 욕을 해대고 부모는 물론, 온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의심했다. 새벽 두세시 집 밖으로 나와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세워진 차들 속에 상상 속 사람들에게 소리지르고 욕하고 문득문득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다. 어딘가 전화해서 욕하고 의심하고 때리고 부시고.


처음 112신고를 받고 출동을 나갔을 땐 단순 소음 신고라고 생각했었다. 새벽에 누가 술을 먹고 또 세상에 시위하는구나 싶었다. 왠 걸 내 동생 또래의 여학생이 경비실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처음엔 술이 너무 좋은 여학생인가 싶었는데 부모가 오고나서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부모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할 뿐만 아니라 친부모가 아니라며, 자신의 휴대폰을 해킹했다며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니까 정신질환이 있는 학생이었다. 하 또...하는 생각이 들면서 귀차니즘이 치고 올라왔다. 입원대상이 될 지부터 생각해보면서 입원이 좋을까 귀가가 좋을까 고민했다. 처음엔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귀가만 시키고 종결할 생각이었는데 지켜볼수록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부모와 얘기하고 입원을 결정했다. 근래 상태가 더 안 좋아졌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이었다. 처음 해보는 입원이라 부모도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보호입원이었기에 구급대가 오기 전까지 아이가 이탈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었다. 부모가 아이의 욕을 그대로 다 받아주면서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추위와 욕을 받으며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아이는 운다며 욕을 했다. 울면 자기가 달라지냐며, 왜 자신을 이렇게 키웠냐며 아버지의 눈물에 슬픈 침을 뱉었다. 분명 슬픈 말이었는데 스스로도 그걸 알고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는 듯 했다.


그때 알았다. 얘가 그냥 아플 뿐이구나. 어떤 문제의, 사건의 '처리대상' 아니라 환자구나.


내가 지금까지 입원시켰던 정신질환자들도 이런 사람들이었을까. 자신의 세계에서 너무 괴로워서 그 괴로움을 스스로 알면서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병이었다, 죄가 아니고. 너무도 당연한 걸 그 순간에야 알았다. 분명 입원하는게 모두에게 이로운 상황이었겠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너무도 불손했다. 무능했고 무심했다.


그들은 아픈 사람이었음을. 이건 참 당연한 사실이다. 누구나 정신질환자가 아픈 사람들이란 것을 알 것이다. 나는 멍청했다. 명제는 알아도 실제 느끼지는 못했다.


구급차가 오고 보호입원을 위해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도 아이는 순순히 따라갔다. 다만 욕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우락부락한 병원관계자에게 끌려가는 아이와 그 아이의 짐을 챙겨 뒤를 따르는 한 쌍의 부모와 그 사이에서 여린 목소리로 욕설이 들리는 생경함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죄책감을 느꼈다.


사건처리를 위해 돌아가는 길, 사수에게 좀 마음이 쓰인다고 얘기했다. 사수도 마찬가지였는지, 자기 딸 생각이 난다며 차를 세우고 내려 담배를 태웠다. 창문 사이로 사수와 얘기하면서 잠깐의 후회를 느꼈다.

 

'경찰은 사무적이어야한다.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어야한다.' 첫 변사 사건을 처리하고 마음에 새겼던 다짐이었다. 그렇게 잘 지내왔는데 어느 순간 그 다짐에 의심이 든다. 중도를 지켜야겠지.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거고 할 일은 해야하니까.


여전히 이 일은 종종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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