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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1984

by 초대받은손님

Comptin d'un antree ete(yann tiersen)


단지 그의 도시인다운 세련된 태도와 권투선수 같은 체격이 풍기는 묘한 대조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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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을 다 읽고 느낀 것 혹은 나의 생각


일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내가 윈스턴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와 같이 참으로 무의미하고 당장 그만둬야 할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자로써 본다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읽는 내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끼다가도 참으로 현실적인 이야기에 조금의 과장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역시 북한이 떠오르지만 꼭 북한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

주인공의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해서 조금 더 무게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윈스턴이 일기를 쓴다는 행위는 현재 내 상황의 의미와 무의미가 아닌 것 같다.

읽으면서 군대에 있을 때 생각이 계속 났는데 윈스턴이 느끼는 그 무의미함을 내가 군대에서 비슷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라는 집단을 바꾸려 하는 행위. (아주 다양한 불만들 하다못해 밥 양이라던가 밥 맛이라던가 같은 불만들도 나는 그저 1년 반 뒤 해방이라는 희망을 보며 버텼고 그 불만을 해결하기는커녕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윈스턴은 목숨까지 걸며 일기라는 무의미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감도 잡히지 않는 무의미함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나까지 막연해졌다.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지만 그럼에도 일기를 쓴다는 것은 윈스턴 역시 이중사고를 갖고 있는 것)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라는 글을 숨기지 않은 것은 내 입장으로 볼 땐 전역이라는 끝의 유무의 차이점일 듯하다.



(3,4)

'결국은 존재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고작 한다는 게 회수해야 할 정기 간발행물이나 서적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만 맡은 팀도 있었다.'


인간의 존재에 자체에 대한 유무를 만들어내고,

그 거짓됨이 아주 완벽히 증거까지 갖춘 사실이 되게 하는 당의 방식에서 나는 되려 편안함을 느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그런지 이 느낌을 얻고는 한 동안 잃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느낌을 온전히 되찾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복기해 보면.


나는 아무래도 현대의 극도록 발달된 저장능력에 끝도 없이 신경 쓰면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 순간에 온전한 나와 함께 온전해 보이려는 나의 모습을 신경 써야 했고 그렇기에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라는 말은 21세기에서 숨 쉬는 내게 잠깐의 쉼을 준 것 같다.



(5)

일주일에 초콜릿 배급량을 일주일에 20그램으로 올려 준 데 대해 빅 브라더에게 감사하는 집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물농장'에서도 자주 느꼈던 이질감과 왠지 모를 익숙함의 느껴졌다.


나는 이런 부당함을 여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느꼈을 때 저항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렇고 사람들은 직접적인 큰 타격이 아닌 이상 그냥 흘러간다.


마치 B.B가 초콜릿 배급량을 10g씩 줄이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 초콜릿 20g은 당연했던 것처럼 변화한다. (나중엔 0g 혹은 -10g이 당연한 것이 될 수도 있겠지)


현대의 인공지능 시대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커진다면 인간은 손 쓸 새도 없이 증발될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증발되는 것은 무섭고 저항하기에는 나약한 내가 싫다.


(이 글을 쓰고 덮었을 때 나약한 나를 인정하고 그냥 나약한 나로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6,7)

불빛에서 그녀를 보니 적어도 쉰 살은 먹은 듯한 늙은 여자였다.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 일을 해치웠다.


성욕은 무엇일까.

식욕과 수면욕과 달리 생사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기본욕구에서 늘 빠지지 않는 이 욕구.


과연 성욕은 필요한 것일까.


음. 필요와 불필요를 떠나서 없었다면 서운했을 것 같다.



그들은 자각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반란을 일으킨 뒤에야 자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하나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 기막힌 한 방을 노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원한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일단 한 방 날리고 보는 것이다.


23년 정도 살아보니 후자가 한 번뿐인 인생에서는 유리한 것 같다.



(8)

윈스턴은 역사책에 나온 말을 의심한다.

과거 보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말을 의심한다.

그렇기에 그는 행동했다.

아주 성가셔질 수도 있는 장소들에 들어가며 진실을 알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이 판을 의심하는 행위가 인상 깊었다.

나도 그렇고 우리들은 모두 이 판에서 살아남으려고, 그 판 위에서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말이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일주일에 몇 달러쯤을 주고 방을 세 얻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아. 이것이 진정 삶이 아닐까.


나는 보다 더 솔직해져야 하고 과감해져야 하며 끝을 볼 여유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만든 안전지대 속 규칙들이 나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지는 꽤 되었다.


저 글은 이런 내게 다시금 삶의 통찰을 신선한 방식으로 상기시켜 주었다.


막연한 미래 그 앞 뒤 어디에도 올 수 있는 끝지점을 말이다.



2부


(1)

이 책에서 연애세포가 꿈틀거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로맨스는 언제 어디서나 재밌다.


윈스턴도 그 중요하다던 일기를 내팽개칠 정도니깐 역시 인생은 love다.


부디 검은 머리 여자의 함정이 아니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2부에 들어가기 앞서 1부 마지막 페이지에 연출된 당의 슬로건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슬로건을 처음 봤을 때부터 1부가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봤지만 그때마다 별생각 없이 읽고 넘겼다. 근데 2부로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페이지에서 뭔가 한 번 짚고 넘어가라는 듯 한 작가의 시그널을 받아서 좀 더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해봤다.


여전히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흥미 없는 글이었지만 전쟁은 평화에서는 북한의 도발이 떠올랐고, 무지는 힘에서는 1부에서 계속 나왔듯이 당이 똑똑한 당원들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은 머지않아 증발된다 듯이 말한 것처럼 톱니바퀴 같은 당원들의 무지가 당의 힘을 키운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자유는 예속은 다른 두 개와 달리 완전히 상반되는 뜻을 가진 단어 2개라서 그런지 2부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2)

줄리아는 당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을 사랑한다.

마치 한국 사회가 싫어서 완벽하게 한국이 원하는 인재가 되는 느낌이다.



(3~9)

계속해서 위선적인 글을 쓰려하는 내가 보여 화가 났다.



옛날에도 이처럼 시원한 여름날 밤에 남녀가 옷을 홀랑 벗고 침대에 누워 욕정이 이는 대로 섹스를 하고, 마음껏 이야기도 나누며 억지로 일어날 필요도 느끼지 않은 채 밖에서 들려오는 평화로운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가능했을까?



중요한 것은 인간의 관계였으며, 죽어 가는 사람을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등의 무력한 행위에서도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만약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비록 대단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패배시키는 셈은 되는 거야.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이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일이오.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행동해야 할 일이란 말이오.




2/8 end

(10 ~ 3부)

압제를 받아도 봉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은 비교할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책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한 것을 써보기 전에 나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다.


1984에서도 그러했고 지금까지 어디에서나 그랬을 것인데 나는 문학의 한 작품을 마주할 때 그 문학을 계속 나의 삶(정확히는 미래)과 연계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행동은 좋은 것이다. 책을 통해 내 삶이 개선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것이기에 확실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1984를 읽으며 그것이 너무 과하고 다른 부분들은 모조리 놓치고 오로지 내 삶만을 빗대어 읽고 있는 내 모습이 불쾌하였다.


그렇게 다른 질문은 던지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생각을 멈추고 줄거리만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식으로 나올까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고 이 문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몰랐었다면 전율이 5배는 더 돋았을 것 같다.



윈스턴은 결국 속마음까지 지배당했다.

난 이것을 윈스턴의 패배보다는 당의 승리로 나를 바라보고 싶다.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

나도 바꾸고 싶은 상식이 있다.

타인을 대할 때 조심스러운 나의 모습에 깃든 상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들이 요즘 좀 거슬린다.



한줄평

나의 밑바닥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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