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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동물농장

by 초대받은손님

읽는 내내 의심하였다.

내 주변에 돼지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내려 했다.


내 생각에 지금 이 세상에 돼지들은 그들의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굉장한 혁명뒤에 말이다.

그들은 그 뒤에서 동물농장의 돼지들처럼

나를 가스라이팅 해왔다.


나는 동물농장의 글을 읽지 못하는 동물들처럼 그들의 세뇌에 가까운 말들에 당하고 있었다.

근래에 꽤나 많은 가스라이팅들을 찾아냈다.

이를테면,


과묵함을 죄악으로 여기거나


진지함을 배척하는 사회분위기


가 무려 오늘만 발견해 낸 것들인데

진지함과 과묵함의 성향을 통용하여 재미없다는 말로 해석하고 이런 성향의 소유자들을 이성의 시선을 이용하여 비난하며 재미없다는 말을 나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난 재밌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고 진지함과 과묵함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근데 과연 그럴까?(오늘에서야 난 스스로에게 이런 기특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성향의 한 부분이 진지함인데 난 그것을 (즉, 내 안에서 소리치는 그 소리를 말이다) 이 악물고 무시하며

사람들은, 이 사회는 진지함을 벌레같이 보아 진지충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원치 않는 가벼움만을 추구해 왔다.


내가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 모습을 계속해서 노출시키다 보니깐 인간관계가 어려워졌다.


오늘부터 이 동물농장에서 벗어날 나를 바란다.




무지는 죄인가?

동물들은 무지해서 스노볼을 싫어했다.

무지의 끝에는 어떤 것들까지 올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무지는 죄다.

우리는 몰라서 짓는 죄가 아주 많다.



check point


계속해서 수정되는 계명들이 소름 포인트였다.

이번엔 어떤 식으로 바뀔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에서는 전율이 심했다.




마찬가지로 돼지들이 두 발로 섰다는 묘사에서도 심히 흔들렸다


돼지 하나가 두 발로 서서 걷고 있었다.

다음 순간 돼지들이 길게 한 줄로 행렬을 지어 본채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모두 스퀼러처럼 뒷발로 선 직립 보행의 자세였다.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돼지들이 두 발로 서서 걷는 이 묘사는 내 상상력에 하여금 충격을 주었고,

마치 내가 그 상황 속에 있는 듯한 침묵을 느꼈다.


더 이상 추상적 우위가 아닌 물리적 우위를 느껴서일까?

옛날에 그 말이 생각나다.

빈부격차가 나중에는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의 차이가 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말 말이다.


더 이상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없는

평등할 수 없는 순간

그 무력함을 돼지의 직립보행에서 느낀 것 같다.





특히 스퀼러의 언변들을 읽을 때마다 난 가장 두려웠다.

그 괴언(망언)에 당하는 동물들의 모습이 왠지 나일 것 만 같아서 말이다.


"돼지들이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존스가 다시 오게 돼요. 존스가! 여러분 중에 설마 존스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


무력하게 수긍할 동물들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이런 스퀼러의 망언에 그냥 허튼소리 하는구나 하고 아무 감정 없이 넘기지 못한 나.


저 망언에 당해 넘어가는 동물들을 보면서 아유 저 바보들이라고 속 편하게 웃어넘기지 못한 나.





내가 소름 돋았던 포인트는 스퀼러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양들의 행동이었는데,


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큰소리로 외쳐 대며 불평을 잠재웠다.


라는 내용이 나올 때면 드라마에서 흔히 볼 법한 언론플레이가 떠올랐다.

역시 내가 당한 혹은 당하고 있는 그들의 환기시키는 전략이 있지 않을지 또 두려웠다.





나폴레옹의 행동력에 대해서는 다소 존경했고 배우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행동의 내용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 의지 혹은 열정 자신을 위해서 계속 발전하는 실행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에 안주하는 법을 몰랐다.

끊임없이 변화를 주었고 끝내 자신의 이상 즉 목표에 도달했다고 난 생각했다.

물론 그 도달하는 과정의 내용은 더럽고 추악하긴 하였으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걸음들이 철저하며 과감하고 망설임 없었다는 점에서

(그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이 증오되어야만 한다) 배움을 얻었다.


+철저하다는 표현에는 끊임없는 역사왜곡(스노볼) 정도가 있겠다.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 같다.





초반에 잠깐 나온 스노볼에게도 배울 점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실행력과 추진력에 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실행력과 추진력이라는 능력을 굉장히 갖고 싶어 한다는 방증이겠다. )


스노볼이 풍차계획을 세울 때 그는 책들로부터 계획을 수립했는데

(집을 고치는 1000가지 방법, 제 손으로 집짓기, 초보자를 위한 전기 지식)


그 책들을 이용해 1년이면 풍차를 완성할 수 있는 계획과 그렇게 되면 노동이 엄청 절약되고 일주일에 3일만 일하면 된다는 이상까지

얻어내어 실제로 실행까지 갈려고 했다.



책을 읽고 그 지식을 바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멋졌다. 지금의 난 그런 지식들을 그저 저장만 하였기에 그런 것 같다.


내가 배운 것, 알게 된 것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복서가 한 말이 인상 깊었다.


그는 알파벳의 나머지 스물두 글자를 깨치는 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욕심 없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어찌 보면 야망 없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이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들이 풍기는 여유로움에 홀려버리는 것 같다.





나는 내게 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능력'

흥미롭다.

가끔씩 난 나 자신의 단점들을 마주하게 되면

너무 불쾌하다.

근데 사실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불쾌한 사실을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난 불쾌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저 문장에서 난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대게 나이 서른쯤을 넘기면 사람들은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대체로 남을 위해 살거나 일상적 일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는 소수의 재능 있는 인간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 보려는 고집 센 인간들이 있고


작가도 이 부류에 속한다.


난 고집 센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쳇바퀴 같은 인생은 1년 반이면 충분했잖아.)






내가 살아 활동할 수 있는 날까지 나는 계속 산문형식에 강한 집착을 가질 것이고 지구의 표면을 계속 사랑할 것이며


단단한 것들과 쓸모없어 뵈는 정보에도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이 문단이 좋았다.








혁명의 배반이라는 큰 테마 안에서 오웰은 우리가 뽑아내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많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생각할 거리로 던진다.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


모든 혁명의 성과는 권력에 주린 지배 엘리트 돼지들의 손에 장악되는가?


권력의 타락은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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