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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Nov 07. 2019

기쁘게 살기

 후회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꺼진 불빛처럼, 날개가 젖은 새처럼 힘이 없었다. 한낮의 밝음을 견뎌내는 것이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렇다. 그때는 스물다섯, 나의 백수 시절이다. 


 내성적이지만 자존감이 있었던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면, 자꾸 근육이 붙어 더 강해지는 유형이다. 그런데 스물다섯의 나는 꺼진 불빛처럼, 작열하는 햇빛에 시들어가는 꽃처럼 힘이 없었다.
 
 나는 그 시절이 내 인생, 가장 후회되는 시간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고 예쁜 시절인데, 길을 잃고 울다가 지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처럼 지냈다. 그 웃음 많던 사람이 잘 웃지도 않고, 모든 상황에 시니컬해져 갔다. 친구가 전화해도, 엄마가 전화해도, 그 누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자신 없는 내 모습을, 내 목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자신감 넘치고 멋진 나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 


 살면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그 때다. 옥탑방에서 창가를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스물다섯의 젊고 예쁜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때는 알았을까? 결혼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아이들 낳고 살게 될 줄을? 어쨌거나 저쨌거나 글 쓰는 일 하면서 살아갈 줄을? 
 몰랐으니까 그 몹쓸 생각을 했다. 당장 희망이 없고, 빛이 없는 것 같으니까. 


 죽으려고 창가를 기어오르다가 하늘을 봤다. 먹색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리고 창가 밑으로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창가를 기어오르다가 멈췄다. 죽기 힘든 날이다. 내가 죽는 날, 날씨가 조금 화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 두 분이 나로 인해 놀라시는 것이 싫었다. 한 마디로 죽기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그 시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이 지면에 담기도 지루하다. 정말 지루하게 눈 뜨고 일어나 무엇인가를 먹고, 책 읽고, 자고, 텔레비전 보고, 다시 자고를 반복하는 생활을 6개월 넘게 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꿈과 현실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글 쓰는 작가는 되고 싶은데 통로를 모르겠고. 뭐, 그런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길을 잃었었다. 


 내가 후회되는 것은, 왜 좀 더 즐기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젊은 나이에 여기저기 다니며 많이 좀 놀지, 그 젊은 나이에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라도 놀지, 그 젊은 나이에 조금 더 많이 웃지 왜 그리 주눅 들어 있었는 가를 생각하면 스물다섯의 내가 너무나 안쓰럽다. 


 돈, 이천 원으로 라면과 계란 몇 알을 검은 봉지에 담아 사 오며 주머니 속에 얼마가 남았는지를 떠올려야 했던 그 시절, 낭만이라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아픈 기억이다. 그 예쁜 날, 죽음까지 떠올릴 정도로 현실과 꿈의 괴리 속에서 힘들어했을 청춘이 지금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춘은 아프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아프다. 그런데 나도 그랬지만 청춘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젊음'과 '시간'이라는 큰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슬퍼하고 있다. 청춘은 그것을 모르고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당장 오늘만 살 것처럼 취해 버린다. 취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다행인데, 취했다가 깨어난 현실은 똑같고 머리만 아프다. 나 역시 그랬다. 술에 취해 깨었을 때, 모든 현실이 그대로인 것을 느끼며 다시 술을 찾았다. 취한다고 해결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서른아홉의 나는 여전히 유명 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산다. 어린아이들 두 명을 케어해야 하는 조건 하나를 더 붙인 상태다. 오히려 스물다섯에는 나 혼자 몸이라 뭐든 해볼 만했는데, 이제는 밖에 나가 내 볼 일 하나 보는 것도 남편과 스케줄을 맞춰야 한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스물다섯의 내가 더 자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불행하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서일까? 스물 다섯 때보다 더 큰 집에서 살아서일까? 조물주가 나를 확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신 것일까?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도 이렇게 나는 매일이 기쁜데 스물다섯의 나는 왜 그렇게도 암흙 속을 헤매며 살았을까? 하는 후회가 드는 것이다. 그 젊고 예쁘고 건강한 나이에. 


 후회가 된다. 스물다섯의 내가 후회가 된다. 가진 것 없고, 현실이 막막해도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더 행복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살지, 왜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살았을까? 


 인간은 무조건 기뻐야 한다. 우리는 기쁘게 살도록 세팅되어 있다. 기쁘게 살아야 행복하다. 웃음이 나오지 않아도 웃어야 한다. 웃다 보면 진짜 웃긴다. 거울 속의 나를 보자. 참 웃기게 생겼다. 웃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웃긴다. 그런 내가 좋다. 그래서 웃는다. 


 인간은 기쁘게 살아야 내가 가진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기쁘게 살기를 원하고, 그 기쁨이 충족되면 다른 사람도 기쁘도록 돕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래, 인간은 본래 그렇게 참 좋은 것이구나.'
 그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당장 울면서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나를 봐라, 죽으려고 창문을 기어오르다가도 날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에게 미안해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나는 죽을 사람이 아니었던 게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래도 죽을 때는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 나는 조금 눈부신 상태가 더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서른아홉의 나는 기쁘게 살려고 노력한다. 정말 기쁜 것도 있고, 이만큼이나 건강한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있다. 어제 사 온 화분에 꽃이 피었다. 봉우리가 너무 단단해서 언제 필 줄 몰랐던 녀석인데, 하룻밤 만에 꽃이 핀 것이다. 횡재한 기분이다. 기쁘다. 잘 지워지지 않는 볼펜 자국을 온 힘을 다해 물티슈로 문질렀더니 지워졌다. 기쁘다. 내 몸이 해냈다. 
 
 기쁨이 별 것인가?
 지금 당장 내 책상 위에 앉은 먼지만 닦아내도 기쁘다. 
 굴러다니던 연필에 쓰여 있는 '좋은 문구'만 봐도 기쁘다. 


 그런 것이다. 인생은 기쁜 것이다. 곳곳에 기쁨이 묻어 있다. 
 스물다섯의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힘들었다.
 서른아홉의 나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것을 발견한 나는 참 기쁘다. 감사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쁘게 살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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