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내려가서 집 짓고 살래?
서울엔 유명한 학군지가 있다.
강남 8 학군으로 대표되는 전국 최강의 학군지 강남구와 서초구. 전통적인 서쪽의 강자 목동, 그리고 노원구의 중계동. 나는 이 중 서쪽에 위치한 목동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물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가고, 대학원을 나온 후 취업을 한 직후 1년까지도 목동에 살았다. 나에게 있어 목동은 내가 자라왔던, 지금의 날 키워준 동네였다.
첫 직장은 판교였다. 목동에서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편도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였지만, 나가서 살게 되면 돈을 모을 수가 없어 독립하지 않고 다녔다. 어쩌면 평생 살아온 목동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게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왕복 3시간의 통근길은 삶의 질을 수직 하락 시켰고, 결국 직장 가까운 곳에 원룸을 구해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을 하면서도 다짐한 것은 목동으로의 회귀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 이직을 해서라도 목동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려 했다. 연어가 알을 낳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내가 목동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마음은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높은 학구열, 그로 인해 모인 비슷한 수준의 부모들과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친구들, 자정에 학원이 끝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전혀 두렵지 않은 안전한 동네. 아이를 키우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친구들.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자란 친구들은 현재도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다니거나 전문직을 하고 있으며, 일로도, 개인사로도 많은 도움을 받거나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이런 환경을 내 아이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괜찮은 직장으로의 이직 기회가 생겨 충남으로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지방행이었지만, 그럼에도 수도권을 떠날 수 없었다. 다행히 역과 가까운 곳에 직장이 위치해 있었기에, KTX 역 인근으로 집을 옮겨 통근을 지속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통근할 정도로 수도권을 떠나지 못했다. 인프라를 버리고 떠날 자신도 없었고, 한번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가 태어났다. 난 슬슬 수도권으로의 이직과 더불어 목동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육아 스트레스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주거 환경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내는 평생을 주택에서 살았다. 아파트라는 수천 가구가 함께 사는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아내에겐 아파트에서의 삶이 생각 이상으로 숨막혔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도 현실을 알기에 주택에 살자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환경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주택살이의 꿈은 마음 한구석에 고이 접어둔 듯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 역시 다시한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랐던 그 곳으로 돌아가는게 맞나?'
'내가 그때 정말 행복했나?'
난 공부에 재능이 있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기 위한 인내도 부족했다. 동네 분위기가, 주변 친구들이 다들 학원에 다니니 나도 학원을 다녔고, 다들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니 나도 늦게까지 딴짓을 하며 '앉아만'있었다. 입시를 준비하며 딱히 가고 싶은 과도 없었고,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성적에 맞춰 전공을 택했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오히려 과도한 경쟁이 숨 막혔고, 주변에 비해 뒤쳐지는 걸 스스로 느끼지만, 그걸 극복할 마음과 의지도 없던 현실이 괴로웠다. 학교 시험문제 중 정답 수를 특정하지 않은 '모두 고르시오' 문제의 답이 5개 중 4개일 정도로 어렵게 시험을 출제하는 학창 시절을 겪으며 자라왔다. 수행평가 1점에 학부모들이 교무실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장면도 여럿 봤다. 결국 '내가 그때 정말 행복했나?'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로 나왔고, 이는 목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나의 믿음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던 중 문득, 아내에게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달이 지난, 20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내려가서 집 짓고 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