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읽었던 만화책도 긴 글을 쓰는 소재가 될 수 있다.
또 슬램덩크다. 30년을 넘게 우려내고 또 우려내도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또 거기에 눈이 자연스럽게 가는 내 모습도 우습다. 그만큼 우리 또래 남자들의 삶에, 그 중에도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하나의 문화였나보다. 그냥 어린 시절 재미있게 봤던 만화로 끝날 수도 있을텐데, 그 속의 이야기 그 속의 캐릭터에서 또 어떤 의미를 뽑아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내용이 또 왜 궁금할까.
'이야기'라는 콘텐츠는 정말 놀랍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는 끝없이 재생산되고 이야기거리가 되며,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소설이 세상에 나온 이후 수 십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판타지 세상 속의 다양한 이야기는 영화로 만화로 게임으로 끝없이 뻗어나가 오늘 날에 이르렀다. 중세 유럽 풍의 판타지 세상 이야기는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콘텐츠로 진화하였다. 모든 중국 무협물의 기반이 된 김용의 무협소설(천룡팔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등)도 그렇고, 미국의 건국신화가 되어버렸다는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도 그렇다. 이야기는 정말 대단하다.
그냥 일본의 수 많은 학원만화 중 하나로 끝날 수도 있는 만화가 바로 슬램덩크였다. 이 책의 작가가 여러 차례 말한 것처럼, 슬램덩크는 흔한 일본 만화의 한 장르인 학원폭력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도 있었다.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었겠지만, 슬램덩크라는 만화는 마치 생물처럼 변해갔다. 회를 더해갈수록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도 많지만, 슬램덩크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스포츠'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지, 마치 그 한계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재미와 깊이를 더 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슬램덩크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원작의 작가가 이에 반응하여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말 그대로 명작 영화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최루성 멜로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 아저씨들이 책을 펴면 잠시 후 훌쩍거리게 되는, 이야기의 순간마다 때로는 오열하기도 하는 '작품'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이 책의 작가는 슬램덩크로 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연스럽게 읽기를 시작해본다.
이 책은 슬램덩크 속 인물을 자신은 어떻게 해석하고 느끼며 감동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송태섭, 서태웅, 정대만, 채치수, 권준호, 변덕규, 윤대협, 남훈, 양호열, 이달재, 김수겸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각 장에서는 작품 속에 드러난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장면과, 그 사이 사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부분들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메워가며 자신의 느낌을 정리하였다.
작가의 문장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느낀 점이지만, 이 책을 쓴 사람은 정말 글을 기가 막히게 재미있게 잘 썼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정말 폭풍처럼 읽었다. 살면서 이런 책을 또 본 적이 있을까 싶다. 만화책을 제외하고 문자로만 쓰여진 일종의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슬램덩크를 재미있게 봤던 내 또래 중년 남성이라면 정말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나 재미있던 점은, 슬램덩크 속 조연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캐릭터들의 서사와 작품 속 그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강백호의 친구라는 중요한 위치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뒤로 가면 갈수록 작품 속에서 비중이 미미해져갔던 양호열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말 그대로 작품 속에서 대사가 몇 번 있지도 않았던 이달재라는 캐릭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내용을 보면서 이 책의 작가가 정말 천재가 아닌가 싶었다. 너무나도 공감되는 이야기를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직업을 PD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만드는 작품은 그 장르가 무엇이던지 정말 재미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책의 작가처럼 내 학창시절로부터 지금까지의 나만의 서사에 있어서도 슬램덩크는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가 농구 선수 출신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참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램덩크를 통해 나름대로 헛 생각을 하며 다음과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쓰며 혼자서 행복에 빠지기도 했었다.
https://brunch.co.kr/@sobong3/101
https://brunch.co.kr/@sobong3/41
슬램덩크의 인물 중 몇 명의 서사와 이에 대한 작가의 해석 중 기억에 남는 공감했던 부분들을 몇 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백호는 슬램덩크의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이타적이며 공감능력이 탁월한 진정한 리더라는 해석이다. 강백호는 그와 관계를 맺는 모든 캐릭터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우당탕탕 되는대로 사는 모습의 이면에는 타인의 감정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공감 능력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안목, 그리고 필요한 행동을 적절한 순간에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정말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가지 덕목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보니, 중년 아재들이 코 끝이 찡해지거나 오열하는 순간마다 강백호의 행동이나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흘러가듯이 이야기했던 권준호의 은퇴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이제 은퇴는 미루어졌다'는 멘트를 친다던지, 자신을 내팽겨치는 신현철에게 '경기 중 일어난 일이니 괜찮다'는 대사, 바스켓맨으로서 정점의 순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안감독에게 '내 영광의 순간은 지금이다'고 받아치는 장면, 농구를 좋아하느냐는 소연이의 물음에 대한 '정말 좋아합니다' 라는 고백, 전설의 명장면 '왼손은 거들 뿐' 직후 서태웅과의 하이파이브 등 수 많은 명장면의 중심에 강백호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채치수와 권준호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그들의 개인적인 캐릭터가 아닌 팀의 '레거시(Legacy)'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순식간에 점수 차이가 벌어져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북산 선수들에게 안감독은 북산이라는 팀을 정확하게 짚어주며 선수들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이 때 안감독의 이야기는 '우리 팀은 채치수와 권준호가 쌓아 올린 토대 위에, 각자의 개성과 장점들이 더해져 만들어진 팀이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화려하고 개성있는 다른 캐릭터들의 역량이 북산의 경기력을 끌어올린 것은 분명하지만, 지루하고 지겨운 일 '토대를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수 년동안 묵묵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북산이라는 팀이 마침내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래의 어떤 순간에 활짝 피어날 후배들을 기대하며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드러나지 않는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느낌이었다.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당시에 상양과 북산의 경기는 엄청난 기대를 주었지만, 생각보다 길지 않게 그려져 많은 독자들이 아쉬워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파편화된 대사와 장면의 사이에서 김수겸이라는 인물과 상양이라는 팀에 대한 재평가를 하였다. 슬램덩크의 전체 스토리 라인에서 상양전은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경기였다는 것이다. 특별한 개성이 있는 캐릭터가 없는 팀이지만,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팀 상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깨끗하고 멋진 경기를 하는 깔끔한 팀이다. 더군다나, 이 팀의 리더는 바로 또래의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캐릭터인 김수겸이었다. 김수겸은 후에 풍전의 남훈 이야기 속에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멋진 모습으로 다시 한 번 회자된다.
인터하이 예선 직전에 벌어진 정대만 패거리의 농구부 습격 장면까지만해도, 슬램덩크는 전형적인 일본 학원 폭력물의 분위기를 띄었다. 하지만, 상양전을 통해 정대만은 지난 시간 자신의 못난 모습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고, 강백호 역시 매 경기 퇴장을 당하는 풋내기에서 진정한 바스켓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상양전 이후 단짝 양호열과 함께 빈 체육관에 들어가 슬램덩크를 성공시키며, '나 이제 자신이 생겼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통해 이 작품은 본격 농구 만화라는 두 번째 챕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나도 그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상양전에는 후에 작중에서 리바이벌되는 중요한 장면들이 있다는 점에서 슬램덩크의 작가 타케히코 이노우에가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작가라는 평가를 하였다. 상양 전에서 지친 몸으로 아웃되는 볼을 살려내는 정대만의 모습은 산왕전에서 볼을 살려내는 강백호의 모습으로 재연된다. 강백호에게 깔려 쓰러졌던 김수겸이 일어나며 경기 중에 일어난 일이니 괜찮다고 말하는 모습 역시 산왕전에게 강백호에 의해 그대로 재연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상양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여 또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공감했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바로 윤대협에 대한 것이었다. 슬램덩크의 수많은 인물 중 거의 유일하게 그늘이 없어보이는 윤대협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바로 수 많은 패배를 통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무조건 일대일로 정면승부하여 이겨야 하는 서태웅과 정우성과는 다르게, 그는 수 많은 패배 속에서 팀으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정우성이 단지 자신의 농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팀의 리더가 자신이 아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 이명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대협은 지나 온 자신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어도 팀은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며 배웠다. 팀으로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동료들의 역량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리더로서의 안목을 자연스럽게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현실의 NBA 농구에서 최고의 득점왕이었지만 챔피언이 되지 못했던 마이클 조던이 팀 동료들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깨달은 이후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경험이 혼자만의 성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와 함께하는 팀원들은 그와 함께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게 되었다. 윤대협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배우며 성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느낌이었다.
이 책의 작가는 천재다. 책을 5~10쪽 넘겼을 때부터 나는 이미 마음이 쿵쾅댔다.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책 중에 가장 크고 순수한 재미를 느끼는 책이었다. 우리 또래 남자들에게 슬램덩크란 그런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고전이 되어버렸다.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수시로 자신이 어떤 포인트에 오열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맞다. 나 역시 중고등학교 때 만화방에 앉아서 여러번 반복해서 보며 훌쩍였던 기억이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도 아닌 일본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음이 우울할 때면 슬램덩크를 다시 꺼내어 보는 중년 아재라면, 이 책을 통해 슬램덩크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즐겨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