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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an 31. 2024

그런 불쌍한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K가 나리타 익스프레스 타는 곳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길을 나섰다. 지하철에 앉아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맥이 끊겼다.      


수다가 소강상태에 들어선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K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왔다.
  언니 특유의 불쌍한 표정.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뒤통수에는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는 1실링짜리 동전만 한 반점이 있게 마련이다.    

  

나 스스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고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도 오래오래 알지 못했다.      

엄마는 성인이 된 나와 동생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하셨다.      


나는 너네를 보면 아직도 불쌍해.      


그 불쌍하고 애잔한 표정은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그런 마음이 그저 엄마의 마음이라고만 여겼다.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아이가 다치면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고통을 받는다. 거울신경이 자기 자식에게는 유독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제왕절개 수술 후 모래주머니를 빼던 순간,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 옆에 남편은 갓난아기를 안고 그저 싱글벙글) 그냥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엄마는 5남매 중 가운데였다. 시종 외할머니의 관심 밖이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자서 척척 잘하는 똑순이 스타일이었다.    

  

공부도 잘해서 명문고 명문대로 척척 진학했다. 그런 나의 엄마에게 아이란 존재는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다 하는 몸집이 작은 어른이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불쌍하게만 본 건 아니었다. 아빠가 ‘레이저’라고 부르는 엄마의 눈빛은 아주 냉혹한 ‘못마땅함’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경험이 처음인 아이에게는 무엇을 하든 도전이고 실패의 연속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주 떨떠름한 눈빛을 보냈다. 그 의미는 '못난 것'이었다.      


엄마의 눈에서 발사되는 레이저는 불쌍함과 동시에 못마땅함이었다. 이 레이저는 강력하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조각해 나갔다. 나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로 마음을 꽁꽁 동여맸다.     

 

아이는 엄마의 시선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를 불쌍하게 보면 아이는 자신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게 된다.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이는 세상을 의심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지금도 가끔 혼자 밥을 먹을 때,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늘 못마땅하고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딱하다는 메시지는 아이 스스로 자기가 그러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모방을 통해 대를 이어 순환된다.    

 

이제는 내 뒤통수에 붙은 1실링을 떼어내어 본다. 학습된 것은 재학습이 가능하다. 모든 것은 그저 과정일 뿐이다.      


나는 지금 어떤 눈빛으로 아이를 보고 있을까?     


별빛이 내리는 밤 같은 깊은 사랑의 눈빛을 충분히 주고 있을까? 


내가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은 눈빛은 '믿음'이다. 





표지그림 : 에곤 실레,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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