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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15. 아침 산책

브런치북

남편과는 자주 산책을 했었습니다.

먼 과거로 올라가 대학생이었던 우리 둘의 데이트 시절, 남들 다 가는 영화관이나 비디오방, 노래방, 술집도 물론 많이 갔지만 당시 살았던 집근처 서울대공원 산책은 빠지지 않는 데이트 코스였습니다. 항상 자금이 부족했던 학생 신분으로 대공원 데이트는 그당시 저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택지였습니다. 그 넓은 대공원을 걸어 이런저런 동물들을 보고 푸르른 나무 그늘을 벗 삼아 산책을 하고, 동물원을 나와 바로 건너편 호숫가를 거닐며 이어폰을 나눠끼고 듣던 음악은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신혼때 첫 보금자리였던 낡은 아파트에선 남편의 퇴근 후 이른 저녁을 먹고 아파트 뒷편 개천가를 함께 산책했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새색시와 아직 앳된 얼굴의 남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거나 읽고 있던 책 또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혼생활 중 극도로 안 좋았던 중반, 우리의 산책은 없었습니다. 서로 얼굴만 봐도 일그러지며 으르렁대기 바빴기에 숨막혔던 그 시간 속에 산책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습니다. 

이혼 후 다시 재결합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산책이었습니다. 당시 혼자 살고 있던 저의 오피스텔 근처에서 우리 둘은 다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혼자 몇 개월을 살면서도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오피스텔 근처에 작은 개울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늦은 나이에 둘째를 임신하고 퉁퉁 부은 다리로 회사를 오가던 때도 저녁이면 무더위를 피해 남편의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노산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에어컨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5층 아파트, 5층 집에서 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잠시 살았던 미국에서도, 또 필리핀에서도 우리는 저녁이면 항상 산책을 했습니다. 캘리포이나에선 아파트내 수영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주말이면 파티 소리로 왁자하던 미국인들을 구경했고,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무일푼으로 돌아와야 했던 필리핀 앙헬레스에선 닥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불타는 일몰앞 저녁 산책길에 주저앉아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곳에서 물질적으로 가진 것 없는 우리 부부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화려하면서도 작은 사치, 그것은 바로 '산책'이었습니다.



다시 제주살이를 시작하고 난후, 남편과 저는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합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저녁 산책도 좋아하지만,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른 아침의 상쾌함을 가득 머금은 둘만의 '아침산책'입니다. 예전 제주시내에서 살던 첫 제주살이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상쾌함과 고요함, 청명함과 만족감 그 모든 것을 이곳 아침 산책길에서 원없이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도 잡초와 꽃, 나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둘이지만 보이는 꽃들은 어쩜 그리도 신기하고 오묘하며 어여쁜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성거립니다. 그저 길가에 피어난 들꽃인줄만 알았던 그 꽃들은 누군가의 세심한 정성에 의해 심어지고 가꿔진 것들이기도 했단 걸 안 뒤엔 그분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개 숙이고 감사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오면 오는대로, 맑으면 맑은대로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하늘은 매번 감탄을 자아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아란 하늘, 안개가 자욱한 날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의 운치는 또 얼마나 환상적인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두려움까지 밀려들면 단지 두발로 걷는 돈 안드는 이 산책길에 혼자 너무 나갔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남편과의 아침산책 길에선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갑니다.

우리 가정의 재정상태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업의 기획, 고객에 대한 불만 또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읽고 있는 소설과 듣고 있는 노래, 각자의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추억들과 지인들 이야기까지 참으로 소재는 무궁무진합니다.

"기생충이 천만 갈것 같아?"

"당연한 거 아냐? 칸 영화제 수상도 거머쥐었고 감독이 봉준혼데? 예술영화라기보단 봉준호 감독은 그래도 대중성을 지향해왔잖아."

"천만은 못 갈꺼야. 소재 자체가 천만 영화가 아니야. 사람들은 좀더 말랑말랑한 걸 원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그 한계가 있어."

"에이. 우리가 보기엔 너무 잘 만든 영화였잖아. 이런게 천만 안가면 어떤 영화가 천만 가겠어? 난 천만 간다에 내 손목아질 걸겠어."


"마케팅 없이 가능한 사업이 있을까?"

"글쎄. 아이템이 아무리 좋고 아이디어가 훌륭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그냥 나는 자연인이다 컨셉 아닐까?"

"정말 좋은 의도로, 정말 좋은 제품을, 정말 좋은 가격에 판매한다면 언젠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유토피아적인 소리지. 결국은 어떻게 포장해서 얼마나 많이 알리느냐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어떤 곳이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정작 사람들은 그런건 관심없어. 보이는대로만 믿고 싶어할 뿐이지. 마케팅과 홍보는 결국 돈이고 돈 없이 사업은 힘든거지."

"그럼 돈 없는 우린 어떻게 해야하지?"

"당장 뭐 어떻게 되겠어?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 뭔가 하나씩 수가 보이겠지. "


"더글라스 케네디 책은 언제 읽어도 날 실망시키지 않아. 난 그 사람 팬이야. 어쩜 그렇게 위트있는 문장을 쓸수 있지?"

"그건 너랑 취향이 맞으니까 그런 거지.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사설이 너무 길기도 해."

"아니지. 오로지 사건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급박하게 흘러가는 당신과 내가 읽은 그 수많은 추리소설들, 지금 제대로 제목이나 기억나는게 몇이나 돼? 단숨에 읽었어도 책장 덮고 나면 몽땅 잊어버리게 되던데. 꼭 사건 중심으로만 씌여질 필요는 없는거 같애."

"그렇긴 하지. 여운이란게 없지. 그런 책들은. 내용도 비슷비슷하고. 더글라스 케네디만 해도 공통된 주제나 소재는 있더라고. 미국 상류층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거. 자국인 미국을 비난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그 사람도 그 우월의식과 자존심은 못 버리는 거 같더라."

"뭐 미국이라고 다르겠어? 상류층의 그들만의 세상은 어느 나라든 다 존재하는 거지. 그 사람 소설은 시니컬하면서도 주인공들은 죄다 잘 배우고 전문직인 인물들이긴 해. 지금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필리핀에서 겪은 일도 한국이라고 다를까 싶긴 해. 사람 사는건 다 똑같은 거 같애."

"필리핀 한인타운 분들은 다 잘 계실까? 그땐 그 사업자들 다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제주도도 타운하우스 봐봐. 거기랑 뭐가 달라. 모르고 덤비면 당하는 거지. 사실 사업이란게 사기와 종이 한장 차이잖아."

"그러게. 여기도 타운하우스는 이제 그만 지었음 좋겠. 다 어찌 감당할려고 그럴까? 부동산 경기 하락하면 흉물로 남을 수도 있는데."


"나 이제 제주도 사람 다 됐나봐. "

"뭐 법적으로 도민 된지는 좀 됐지. 근데 왜?"

"얹그제 서울 다녀왔잖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리무진 버스 타러 공항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걸음이 엄청 빨라지는 거야. 그리고 마음이 막 조급해지는 거야. 주변 사람들도 막 빨리 걷고 눈앞에 버스는 계속 오고 사람들은 엄청 많고. 갑자기 내가 그동안 이렇게 게으르게 살았나 싶으면서 심장이 벌떡거리더라고. 내가 이렇게 천천히 걸을 때가 아닌데 하면서 머릿속에선 그동안 생각만 하던 일들을 빨리 헤치워야겠단 조바심이 막 들고. 버스타고 나서도 잠이 안 오는거야. 머릿속에 생각들이 휙휙 막 날아다니고 결국은 머리가 지끈지끈 하루종일 아팠어."

"서울 가면 그런게 있더라. 나도 느꼈어."

"근데 더 웃긴 건, 제주도 오는 비행기 타고 내린 순간 갑자기 평온해지는 거야. 마음이 안정되면서 바깥풍경만 눈에 들어오고 내가 하려던 것들이 갑자기 뭣이 중한디가 되어버리는 거 있지. 어차피 하나씩밖에 못하는 건데 세상이 무너지냐, 누가 죽어나가냐 이러면서 천하태평이 되더라고. 그동안 제주도 사람들 너무 느리고 서비스 정신 없다고 불만이었는데 어머나, 내가 그렇게 된 건가봐."

"어차피 한 가지씩밖에 못해. 그동안 많은 걸 한꺼번에 해 왔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야. 그때도 마음만 분주했지 한번에 하나씩만 했던 거더라고. 제주도가 사람을 여유있게 만드는 것도 물론 있지. 마음의 여유 아닐까?"

"그런가? 나 예전에 정말 빠릿빠릿하고 멀티였던 거 같은데, 내 기억이 또 왜곡된건가?"

"너 예전에도 빠릿하진 않았어."

"우이씨..."


아침산책길은 한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사오십분, 시간이 없어 짧은 코스로 돌면 삼십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약간의 시간을 투자한 후 얻는 만족감과 효과는 기대 이상입니다.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좋은 기운, 동네가 주는 편안함, 코 끝을 스치는 바람과 꽃 향기의 새초롬하면서도 황홀한 느낌. 제주살이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우리의 가장 큰 사치, 오늘도 우리의 '아침산책'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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