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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10. 귤밭에서 라방을

브런치북_다시, 제주

팔아도 팔아도 귤은 많았습니다. 

입도 초기에는 지인들을 통해, 그 다음에는 인터넷 카페와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판매했지만 그럼에도 때가 되면 익고 때가 되면 따줘야 하며 또 그 때를 넘기지 않고 팔아야 하는 그 타이밍을 맞춰야했기에 플랫폼은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저희도 빌린 밭이었지만 도매상이 되어 다른 판매자에게 좀더 싼 값에 팔기도 하고 행사가 열리는 곳이면 귤박스를 들고 플리마켓에 참여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귤은 참 흔한 과일이었고 그만큼 경쟁은 치열했으며 판로는 한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경로를 알아보던 중 그때 막 떠오르기 시작한 '라이브 커머스'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언택트 소비시대에 가파른 성장을 하고 있는 홈쇼핑 같은 곳에 팔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지만 그 유통의 구조를 알고 있는 저희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처음 제주 농수산물 유통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격려와 응원을 하며 홈쇼핑에도 진출해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도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진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물량도 충분했기에 홈쇼핑 입점을 주저할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홈쇼핑 아무나 들어가는 거 아니야. 일반 사업자가 판매하겠다고 해도 엠디가 잘 만나주지도 않아. 연결해주는 전문 유통대행 업체가 두세곳씩, 더한 곳은 대여섯개 업체가 끼어있는 곳도 있어. 홈쇼핑에선 가격이 먼저야. 그 공급가를 홈쇼핑에서 미리 정해버려. 그러면서 수수료는 엄청 쎄지. 이후 반품이나 환불에 대한 부분도 당연히 업체가 모두 떠안는 조건이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곳만이 들어갈수 있는 데가 홈쇼핑이야."

저희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겨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홈쇼핑은 참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쇼핑 호스트들의 맛깔난 진행능력과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구매, 그로 인한 파급효과는 판매자라면 놓치기 아까운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홈쇼핑과 비슷한 매체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홈쇼핑처럼 입점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별도의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며 중간 밴더들을 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라이브커머스'였습니다. 


처음 이 플랫폼에 대해 들었을때 저는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저희같이 영세하고 전문 호스트가 아닌 아마츄어들도 직접 영상을 통해 판매할 수 있다니 딱 저희를 위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로 전문 호스트를 고용하거나 마케팅할 여력은 없고 신선하고 맛있는 자부심은 있는 저희같은 사람을 위한 플랫폼 같았습니다. 마침 신생으로 이제 막 출발한 한 라이브커머스 업체를 컨택하게 되었고 바로 입점 승인이 났습니다. 홍보기간이라 수수료도 생각보다 괜찮았고 별도의 장비가 필요없단 점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라이브커머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좀 생소했던 때라 크게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지만 어찌됐든 대세는 실시간 방송이었기에 남편과 저는 분명 확장 가능성이 높은 플랫폼이라 봤으며 당장은 큰 매출이 없더라도 꾸준히 하다보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방송날짜가 잡히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입점하여 진행중인 업체들의 방송을 모델삼아 찾아봤습니다. 

그야말로 저희같은 아마츄어들이 많았습니다. 별도의 콘티도 없고 무대나 소품의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무턱대고 들이댄 방송도 많았고 방송은 시작됐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5분간을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소비자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며 떠들다 끝난 방송도 있었고 방 한켠에서 혼자 고기를 굽고 먹으며 감탄사를 연발하다 끝난 방송도 있었습니다.

사십대인 저희에게 사실 요즘 유튜브나 아프리카TV같은 동영상은 많이 어색했습니다. 아무리 먹방이 대세고 유튜버가 최고의 장래희망인 시대라지만 영상을 보는 내내 그들의 어색함 속에서 드러나는 부끄럼이 왜 일면식도 없는 제 몫이었는지 보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아, 나 이거 못할 거 같은데?"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이미 방송날짜는 잡혔고 배너제작과 함께 예고편까지 나간 상태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특유의 도전의식이 발동했습니다. 

남편의 아이디어로 저희는 직접 귤밭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기로 했습니다. 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밭도 보여주고 귤 따는 모습도 보여주고 바로 따서 바로 보내준다는 컨셉에도 신뢰가 가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니 뭔가 그림이 남다를 것 같았습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보는 저녁 시간대가 아닌 한낮이어야 한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좀 달라보이고 싶었기에 밀어 붙였습니다.  


예정된 일요일 낮 2시가 되었습니다. 전날 골라놓은 농부 컨셉의 밀짚모자를 쓰고 흰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좀 진하다 싶을 정도의 메이크업을 하고 생전 안 바르던 마스카라까지 신경써 꼼꼼히 발랐습니다. 부랴부랴 당일 아침에 썼던 대본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감귤밭으로 향했습니다. 콘티대로 감귤주스를 만들 블렌더와 컵, 당도를 측정할 당도계, 귤을 딸때 필요한 전지가위와 귤을 소복히 담을 라탄 바구니, 그리고 갬성을 더해줄 체크무늬 매트담요까지 챙겼습니다. 모든 소품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싱싱한 귤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핸드폰 앞에 섰습니다. 

순간 준비했던 말들도 모두 사라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도망가고 싶단 생각만 떠오르는데 남편은 앞에서 카운트를 시작했습니다.  3초전, 2초전, 1초전, 시작!

영상으로 멋적게 웃고 있는 못생긴 제 얼굴이 화면에 보였습니다. 절망했습니다.

'헉. 내가 이렇게 못생겼던가?'

예쁜 연예인까진 아니더라도 아주 못생긴 연예인보단 조금은 나을꺼라 생각하며 그동안 제 입에서 나왔던 연예인들에 대한 외모비하 발언들이 모두 후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동적으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어색하게 웃었지만 이미 정신은 분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난 오늘 귤을 팔러 온 거다. 적어도 내가 팔고 있는 이 귤은 소개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란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두서없이 준비한 얘기들을 해 나갔습니다. 

귤따는 모습을 클로즈업할 땐 덜덜 손이 떨려 급하게 가위질을 해댔고 귤을 블랜더에 갈땐 다 갈리지도 않은 덩어리진 과육을 통채로 컵에 따라 부었으며 컵에 따른 쥬스가 목구멍을 타 넘기도 전에 "음~ 맛있어요"를 연발했고 신고 있던 제 신발이 예쁘다는 어느 댓글엔 기가 막혀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방송하랴, 댓글 확인하랴, 주문 확인하랴, 준비한 설명하면서 질문에 대답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카메라를 찍고 있던 남편이 중간중간 보내는 소리 없는 지적질에도 자동적으로 신경질적이 되어 인상쓰는 모습이 그대로 영상에 보여지기까지 했습니다. 

30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참 길었습니다. 해야할 멘트가 있었고 생각이 많다보니 말은 점점 빨라졌고 준비한 내용을 다 말하고 났는데도 시간이 남아버려 애드립으로 때우자니 미사여구만 점점 화려해졌습니다. 그냥 맛있다고만 해도 될 맛에 대해서도 '정말 달콤하죠', '진짜 맛있네요.', '엄청 맛있죠.'란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방송, 라이브 방송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송시간이 끝났고 그제서야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판매량은 12박스. 

생각보다 저조한 판매량이었지만 첫방송치곤 나쁘지 않다 위로했습니다. 그저 방송을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만 기뻤습니다. 

첫번째 방송 이후로 세번정도 방송을 더 했습니다. 귤밭에서 흑돼지를 굽기도 하고, 플리마켓에 참여한 바닷가에서 별말없이 파도치는 바다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공사 중인 집 창고에서 고기를 구운적도 있습니다. 방송횟수가 늘수록 방송이 좀더 쉬워질 줄 알았는데 매번 방송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부담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오늘은 또 뭘 보여줘야 하나? 남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시켜야 하나? 오늘은 또 뭘 입어야 하나?'등등 고민꺼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나마 귤철에는 귤이 좀 나갔지만, 흑돼지는 판매가 저조했습니다. 과일이야 남녀노소 누구나 먹는 품목이니 그나마 판매가 되었지만, 저희가 취급하는 야채나 고기, 생선의 주 소비층은 주부인 4,50대였기에 그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후로 방송은 더이상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귤밭에서의 라이브 방송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박했던 기획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엔 부끄러워 영상을 다시 보지도 못했지만 그때 방송캡처라도 좀 해둘껄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금은 웃으며 반추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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