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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9. 귤밭이 좋아

브런치북_다시, 제주

제주의 가을이 되었습니다. 

육지처럼 울긋불긋 화려한 은행과 단풍은 없지만 억새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의 가을은 쌉쌀하면서도 아련했습니다. 무엇보다 늦가을부터 노오랗게 익어가는 귤밭의 귤들은 '여기가 제주도구나'라는 느낌을 실감나게 해주었고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리며 새어나왔습니다.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차를 타고 지나가는 곳곳에 펼쳐진 귤밭에선 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보기만 해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익어갔습니다. 어느새 제주의 귤철이 온 것입니다.


추석 선물세트가 지나자 남편과 저는 이 귤들을 팔아보기로 하고 귤 농장을 수소문했습니다. 아는 곳이 없어 매입을 원한다고 올린 인터넷 카페를 통해 몇 분이 연락을 주셨고 농장을 방문해 본 결과 친환경 농사를 하시는 분의 귤이 저희 입맛엔 맛이 있어 매입하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주문을 받아 수량을 넣으면 그분들이 따주고 저희가 그 귤들을 싣고 와 택배로 보내는 조건이었습니다. 귤 농장이 제주 동쪽 조천에 있어 저희가 살고 있는 서쪽 애월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육지에선 출퇴근 거리 1시간은 기본이라 그 당시엔 거리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트럭이 없어 낡은 무쏘의 뒷자리를 눕히고 귤이 담긴 콘테나를 가득 쌓은채 꼬불꼬불한 길을 시속 60km로 조심조심 집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주문이 늘어 매입물량이 많아지자 밭주인은 직접 따줄 시간이 없으니 아예 밭떼기로 사서 따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해왔습니다. 귤을 따본 적도 없고 밭떼기란 개념도 몰랐기에 그분들이 제시한 금액이 적절한지조차 가늠이 안됐습니다. 남편의 지인인 현지인에게 자문을 구하니 보통 밭의 귤나무 수를 세어 보면 대략적인 과수의 무게가 나오고 그 무게를 현 귤시세로 곱해보면 어느정도 매입금액이 가늠될 꺼라 얘기해주었습니다. 고민끝에 저희는 직접 귤을 따서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귤 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귤을 따는 전정가위도 사고 손에 꼭 맞는 목장갑도 사서 꼈습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편한 신발을 신고 아침마다 귤밭으로 출근했습니다. 파랗고 드높은 가을하늘에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가득한 귤밭엔 '샥샥' 귤따는 가위소리만이 크게 울렸습니다. 

그 고요, 적막, 평화는 저희에게 고스란히 치유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귤밭에선 모든 걱정과 상념이 물러났고 온전한 나와 귤만이 있었습니다. 귤밭 가득한 귤나무엔 나무마다 귤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곳에서 귤을 따는 그 시간만큼은 그 귤들이 모두 우리 차지였고 우리는 더없는 부자였습니다. 

모아진 귤을 수레에 담아 입구까지 끌고와 다시 콘테나에 나눠 담고, 그 무거운 콘테나를 차 뒷좌석에 차곡차곡 쌓아올릴 땐 '아이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또 그 콘테나를 하나씩 내리고 주문 받은 만큼 박스에 골라담아 테이핑을 하고, 송장을 붙인 박스를 차곡차곡 쌓아 택배차가 올때까지 기다리는 일까지 끊임없는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애써 보낸 귤 박스가 육지에 제때 도착했는지, 깨지지는 않았는지, 받아본 이는 그 맛에 만족하는지 확인하는 일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기치 않던 기상악화로 인해 물건이 제때 제대로 도착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야 했으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고객의 입맛에 대한 사후관리 또한 판매자의 몫이었습니다. 

그 짧지 않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댓가는 놀랄만큼 금전적으로 적어 처음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4년째 귤밭을 매입하고 귤을 직접 따고 포장하고 판매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귤밭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대학나무'라 불릴만큼 귤농사 짓는 집이면 자녀 대학 보내는 몫을 톡톡히 했다던 귤값이 언제부턴가 헐값이 되어 귤따는 인건비도 건지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만, 레드향이나 한라봉, 천헤향등의 새로운 만감류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지만, 그 많던 제주의 귤밭들이 부동산 개발로 인해 그 자리에 타운하우스가 들어서는 것이 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귤밭을 포기 할수 없는 이유, 그것은 저희에게 귤밭은 여전한 치유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극조생이 시작되는 늦가을부터 조생이 한창인 한겨울을 지나 만생이 수확되는 1월 말까지, 이어지는 귤밭에서의 일과는 참으로 고되어 때론 울면서 귤을 딸 때도 있지만 저에겐 겨울이면 여전히 놓칠수 없는 최고의 작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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