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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22.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북_다시, 제주

전 원래 아침형 인간입니다.

놀기 좋아하고 모임의 껀수도 많았던 이십대엔 밤을 새기도 하고, 먼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둘러앉아 술 마시는 걸 즐기기도 했지만 사실 아침이 더 활기차고 에너지가 솟아나는 인간이지요.

그러나 도시에선 밤이 참 아름답긴 합니다. 늦도록 밝은 가로등, 아파트 사이 사이로 꺼지지 않는 불빛들, 야식 먹기 좋은 즐비한 배달 메뉴까지. 한낮의 분주함이 사라지고 모든 가족이 잠든 그 고요의 시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허락된 시간이기에 더 특별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밤은 다릅니다. 특히 제가 살고 있는 제주의 중산간은 해가 더 빨리 지기 때문에 밤이 긴 편입니다. 생각 같아선 산장같은 이 집에서 긴긴밤 콕 박혀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사색도 하고 참 낭만적이고 운치있게 지낼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더군요. 

대부분의 농촌생활이 그렇듯 해가 지면 모든 생활 또한 그에 맞춰 돌아갑니다. 일찍 해가 지는 만큼 저녁밥도 일찍 먹고 잠자리도 일찍 듭니다. 특히 겨울의 이곳은 해안가보다 평균 1~2도는 낮은 기온 때문에 해가 지면 더더욱 외부와 차단할 준비를 합니다. 창문마다 커텐_그것도 암막커텐이어야 합니다_도 꽁꽁 닫고 내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 이를테면 난방비 비싼 제주답게 기름 보일러는 무서워 적당히만 데워주고 부실한 온기를 채워줄 석유난로나 화목난로, 온풍기등을 잠시 돌려줍니다.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스멀스멀 잠 기운이 쏟아집니다.


영화도 책도 늦게까지 볼수 있는 동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낮에는 생업이 있다보니 일찍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고된 육체의 노동이 대부분인 일이다 보니 저녁이 되면 금새 잠이 듭니다. 그리고 늦게까지 있어봐야 저처럼 태생적으로 비관적인 자아들은 그 밤이 몹시도 괴롭습니다. 

모처럼 든 낮잠으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던 지난밤엔 참으로 오랜만에 책도 보고 밀렸던 일들도 계획해보리라 다짐했건만 결국 이런 저런 생각들로 오히려 번민만 깊어졌더랬습니다. 오롯이 집중하여 책을 보지도 못했고 미뤘던 일들을 계획하기도 전에 '내 인생이 이대로 굴러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구심부터 '왜 모든 일엔 계획 따위 없이 그냥 살면 실패한 인생일까?'란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그동안 애써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했던 주변 사람들의 근황까지 휴대폰으로 하릴없이 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번민의 끝은 '결국 나는 회생 불가능한 실패한 인생'이라는 극단의 결론을 내린뒤 깊은 우울감에 빠져버렸습니다.

평소 몹시도 현실적이며 지나치게 냉정하다 싶을 만큼 이성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저로서는 맥락없는 상실감과 어울리지 않는 우울감입니다. 아마도 '밤'이란 요물이 빚어낸 또 다른 저의 모습이었겠지요.


예전엔 저의 이런 맥락없는 의식의 흐름과 방심한 모습이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낯 부끄러운 감정의 찌꺼기들을 대방출했던 밤의 낙서들,  언젠가부턴 그 또한 스스로 낯간지러워 술이란 도구에 의지하며 하릴없이 홀짝이다 훌쩍이며 잠든 밤들로 이어졌더랬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주 입도 후 제주에서의 밤은 대체적으로 충실한 잠의 세계였습니다. 그건 제주에서의 삶이 갑자기 나아졌다거나 급격한 정신적 수양이 완성되었다거나 현실에 만족하며 상념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사실 아닙니다. 현실에서 사실 'happily ever after'는 없으니까요. 

사람과의 관계는 어디든 늘 어렵고 하는 일도 맘같질 않아 늘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고 돈이 없으니 서럽고, 아이들은 커가고 생활은 하루하루 공포로 다가오는 저는 중년입니다. 잠이 안 오는 한밤중엔 sns를 보며 '나만 이렇게 쳐박혀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우울함에 눈물 흘리던 지난밤은 가고 오늘 아침은 햇살좋은 아침입니다. 푸른 나무들 사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맞으며 달리는 아침 드라이브 길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제주의 얼굴로 '이대로 죽어도 좋아'를 외치게 만드는 단골 포인트입니다. 오늘 아침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선 흔치 않게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오는 길 저는 부서질듯 눈부신 햇살에 넋을 놓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음악, 이 햇살, 이 온도, 이 풍경



이상 바랄게 없었습니다. 지난밤, 이 나이 되도록 가진 것 없고 불안한 이 인생이 한 없이 초라하고 애잔해 속이 쓰리던 것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와 경계심에 울분이 쌓이던 것도, 당장 다음 달의 생계를 걱정하고 또 다음 해를 걱정하며 목이 조여오던 것도 일순간에 봄눈 녹듯 그렇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이곳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오롯이 느끼며, 지금 당장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저를 평화롭게 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고, 욕심을 내려놓게 하는 제주의 아침, 그래서 제주의 아침은 밤보다 아름답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골고루 비춰주는 햇살의 충만함엔 조용한 위로가 스며 있습니다. 

토닥토닥. " 너무 애쓰지 마."

저는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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