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교장 선생님과 함께 다윤이네 집으로 가정방문을 했다. 오늘도 등교하지 않은 다윤이를 데리러 간 것이다. "다윤아, 복지 샘이야. 오늘은 교장 선생님과 함께 왔어!"
다윤이를 부르자마자 현관문 너머로 들리던 인기척 소리가 멈췄다. 초인종을 누르며 다윤이를 애타게 불러보지만 숨죽여 없는 척했다. 아무리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윤이는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똑 똑 똑" 애꿎은 현관문만 연신 두드리며 다윤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한동안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윤이를 부르는 교장 선생님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 번호를 알려줄 테니 뭐하느라 학교에 안 가는지 알려달라"
마침 문을 열어서라도 학교에 데려가라는 아버지의 사전 동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현관문을 열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억지로 학교에 데려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었다.
그날 이후 교장 선생님은 현관문을 열어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셨다. 아무리 보호자가 사전 동의를 했더라도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한 행동도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다. 교장 선생님과 함께 그런 점을 염려했다.
사실 무엇보다 아이의 자립력을 키우는데 방해되지 않을까 고민되었다. 억지로 학교에 데려갔을 때 오히려 반발심만 키우는 것은 아닌지. 등교하지 않으면 교육복지사 선생님이 데리러 온다는 새로운 규칙 내지 그로 인해 좋지 않은 습관이 들까 봐 걱정되었다. 오히려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고민된 것이다.
진정 아이를 위한 일은 무엇일까.
그러던 어느 날 동료 교육복지사와 모둠 활동하는 학습 동아리에서 선택의 실마리를 찾았다. 아이를 돕다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일이 진정 아이를 위한 것인지 모를 때,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할 때 피해의 최소성 원칙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차악 내지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무엇이 최선의 선택일까. 자립력을 키운다고 가정방문을 하지 않으면 등교하지 않는 날이 늘어날 것이다. 수업 일수가 모자라서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유예가 될게 뻔하다. 지금도 학교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한데 자신보다 어린아이들과 같은 학년이 되면 얼마나 적응하지 못할까 싶었다. 아이가 의존하더라도 가정방문해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덜 나쁜 선택이라고 나름 정의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 선생님이 다윤이가 아직 등교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여전히 기다려주는 것이 맞는지, 데리러 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되는 것이다. 등교하지 않은 아이를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현관문을 열어서라도 데려오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진정 다윤이를 위한 일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