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7일 밤 국군의 미아리 저지선에서는 맹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서울 시민들은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었다. 새벽에는 한강 인도교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끊어졌다. 피난에 나선 무고한 인명이 대거 희생됐다. 이윽고 날이 밝자 서울은 딴 세상이 됐다.
보통의 아침이다.
종종 걸음만이 종횡하는 흔한 아침이다.
오가는 이 눈길 한 번 내지 않는 거리에서 애먼 신호만이 굼벅인다.
나는 정지된 거리에 서 있다.
전찻길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한다.
미아리고개로 자동차보다도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인가 싶다.
이 수선한 공기는 생존한 분주함인가?
아, 아니다.
빳빳한 얼굴이 꿈틀 거린다.
냄새가 난다. 죽은 자의 냄새가 난다.
군인들이 떼를 지어 행진한다.
허면 어둠이 삼킨 것은 무엇인가.
인민군이 잔뜩 들어와 우리 마당에서 훈련을 했어요. 경나무 옆에서 쉬면서 하는 말이 저 아랫마을에 가니까 상투 튼 할아버지가 오더니, “빨갱이님 저 좀 한 번 살려달라”고 그랬다고.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같이 웃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매일 회의 나오라고 하고. 애들 데려다가 노래시킨다고 하고. 아침마다 모여서 노래 부르라고 하고. 매일 사람들 동원해서 산 뺑 둘러서 파고.
거꾸로 거꾸로 간다.
지난 밤엔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가.
부끄럽다.
마주오는 커플은 맞잡은 손을 보란듯 들어 올린다.
새침한 것은 언제나 여성의 몫이다.
나는 가벼이 목례를 건넨다.
얼굴마다 동냥처럼 웃음이 베어 나온다.
가로지르는 이 손에 쥔 가방에 지키지 못한 약속이 실려간다.
뒤 따르는 이도 한 걸음 앞서가는 이도 한 아름 실어간다.
- 내 오늘 수지 맞아 기분 좀 내었소.
삼삼오오 무리지어 걷는다.
으슬으슬 몸이 식어간다.
차갑다.
군인보다 우리가 더 죽었어. 군인들은 싸우다 죽는다지만 우리는 맨몸에 밥 가지고 가다 많이 죽었어요. 그때 보급대 무진장 죽었어요. 박격포, 조그만 따쿵총 떨어지잖아. 무진장 죽었어, 보급대. 전쟁 전에.
여기 보도연맹 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여기서 셋인가 넷인가. 그 사람들, 스무 살여 되는 사람들은 영흥 가서 다 죽고 젊은 사람들은. 그때 여기가 열여덟 살 먹은 사람들은 보도연맹에 전부 가입했는데,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안 했어요.
"오늘 밤을 버티기 어렵다"
그동안 낙관적인 보도만 들어 왔던 서울 시민들은 처음으로 수도의 위기를 인지하였다. 서울 시내에는 탈주 기회를 놓친 장병들이 곳곳에 숨어있었고, 인민군에게 잡힌 병사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대피로를 찾아 몰려들었으며 증원부대 차량은 계속해서 북상했다. 서울은 혼란에 빠졌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역사적 현장 속 지역민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기록되고 조사되지 못했는데, 정작 그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지역 주민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전쟁을 보는가, 누구의 언어로 경험이 쓰이는가에 따라 역사의 얼굴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역을 나서자 마자 '아지트'라고 인이 박힌 빽빽하게 들어선 소모품 점과 창고형 대형 매장들이 반긴다.
근래에 옷가지에 발품을 판 이로서 좀 섭섭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신뢰성이 좀 떨어진다고 해야할까?
시장 지형이나 경제 상생의 원리야 잘 모르지만 그러한 아지트의 밀집은 일종의 위화감을 형성했다.
횡보하는 청춘들은 조잘조잘 이야기가 쉼이 없다.
무슨 말이 오갔더라?
눈에 익은 건물들은 어디서 봤더라?
당사자들은 그 기록과 보존이 시급한 일이다.
시대의 얼굴 위로 짙게 명암이 드리운다.
거세어진 저항 앞에 나는 머뭇거린다.
유행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꿈에 그리거나 가슴 아파하는 뭔가를 건드렸을 때 노래는 들불처럼 번져 국민가요가 된다. 시대의 풍파가 거셀수록 유행의 강도는 세진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삼팔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유행가는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관통하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래고 다시 일어섰을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라.”
*** 이 글은 월간중앙,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에서 수정 발췌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