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히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지속은 병히와 결혼을 결심했다. 의아한 이유로 보이리라. 지속은 나름의 철저한 철학을 담아 겁 많은 병히를 베필로 점찍었다.
봉기는 소중한 딸 지속에게 몹쓸 놈들이 꼬일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그만의 주입식 교육(가스 라이팅?!)을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입학을 앞둔 지속을 불러 앉히고 봉기는 걱정이 묻어있는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절대 예비역과 말을 섞지 말 것이며 남자들이 너에게 좋아한다, 예쁘다 하는 소리는 널 자빠뜨리려 하는 말이니 믿지 말아라."
스무 살 지속은 충격을 받았다. 좋아한다, 예쁘단 소리에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니! 나를 왜 자빠뜨리려 하는 거지? 공격인가? 순진한 지속은 봉기의 말을 백 프로 이해 못 한 채 이성을 향한 경계 태세를 빠짝 세우고 곁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지속은 병히를 만나기 전까지 모솔로 한창 예쁠 시기를 낭비했다.
봉기의 딸 단속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히와 교제를 시작한 후로 지속에겐 없던 통금 시간이 생겼는데 다들 알지 않나? 젊은 남녀에게 통금시간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그저 부모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귀신 쫓는 부적 같은 장치랄까. 지속에게도 통금은 무의미했다. 봉기는 한 번씩 헤어진 연인에게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끔찍한 기사를 아무 코멘트 없이 지속에게 링크로 보내곤 했다. 지속은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겁 없는 상남자를 혐오했다. 담배를 꼬나물고 말술을 마시며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며 가슴 근육을 거울 앞에서 움찔대며 만족하는 마초남은 지속에겐 최악이었다. 지나가는 행인과 어깨만 스쳐도 뭐야? 하며 날을 세우고 너는 내가 지켜, 널 보호해줄게. 이러며 오히려 여자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남자들, 지속은 그런 이들이 거북했다. 그런 부류의 남자들이(아닐 수도 있겠지만) 공격성을 여성에게로 표출하면 어떻게 될까? 나를 지켜주던 내 남자의 근육이 나의 머리채를 잡는데 쓰인다고 상상해 보시라.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사귈 때는 누구나 좋은 남자다. 정말 좋은 남자는 헤어졌을 때 스토킹이나 폭력 없이 이별을 받아들이는 남자라고 지속은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질 못할 남자가 좋았다. 연애 때 엄지손톱만 한 벌레가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는 병히를 보며 지속은 높은 점수를 그에게 줬다. 롯데월드 자이로드롭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타는 병히는 가산점까지 받았다. 겁이 많고 징그러운걸 못 견뎌하는 병히는 지속에게 받은 점수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지속은 확신했다. 병히는 쫄보라 범법행위를 절대 못할 위인이란 걸. 병히는 연애기간 포함 결혼 생활 동안에 울면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경우는 있었어도 지속에게 욕설을 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적은 없었다.
지속이 이런 남다른 체크 리스트를 가졌단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선천적으로 평범한 여성의 힘으로 남성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남녀의 몸싸움은 게임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혹여나 있을 싸움에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해 지속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이 아닌 으앙 하고 울어버리는 남자를 무의식적으로 찾는 걸 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병히는 겪을수록 알아갈수록 지속이 찾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비록 눈치가 좀 없고 센스가 부족하고 마마보이 기질이 한 꼬집 정도 보이며 재밌는 어머니를 뒀어도 지속은 그를 감당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아기와 강아지를 그냥 못 지나치는 병히의 모습이 좋았다. 작고 귀여운 것들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는 병히의 소년미가 좋았다. 작은 키에 험상궂은 이목구비, 그래 바로 너였어!
아직까지 지속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외부로부터 병히가 지속과 아이를 지키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긴 했지만. 병히 말로는 소싯적에 격투기 학원도 다니고 원펀치 쓰리강냉이였단 헛소리를 나불댔지만, 냉정한 지속은 병히에게 누누이 말했다. 맞서 싸울 생각 말고 남자의 자존심이니 뭐니 다 소용없으니 그냥 도망가라고.
지속은 병히가 현명하기에 자신과 아이를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주변 사람과 소소한 시비가 붙으면 지속은 병히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막장인생이라 잃을 게 없으면 어떡해? 그러니 우리가 피하자."
그러면 체크 리스트의 유일한 만점자 병히는 지속의 말을 늘 들어줬다. 산적 같은 비주얼에 마초남을 동경하는 병히가 겁이 심하게 많은 쫄보란 사실을 모두들 모른 체 해주시길. 쉿! 우리들만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