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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자존심 빼면 지속이 아니지 편

by 이지속

흙수저로 평생을 소박하게 살아온 지속은 결혼으로 자신의 삶이 딱 한 뼘만큼만 나아지길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작은 바람은 이뤄질 듯 지속의 코 앞을 알짱알짱 거리며 다가올 듯 멀어졌다.

지어진지 삼십 년이 넘은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연립 5층에서 인생의 전부를 살아온 지속의 소원은 새 아파트 입주였다. 새집증후군에 걸려도 좋으니 새집에서 살아봤으면! 그 간절한 소원은 끝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결혼 전 지속은 걱정이 많았다. 병히가 인사를 하러 와서 지속이 사는 꼴을 보면 도망갈게 뻔했다. 지금부터 삼십 년 전 지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지속의 오래된 집을 소개해보려 한다. 놀라지 마시길.

창문은 나무 프레임으로 미닫이 형태였다. 잠금장치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경첩을 맞춰 돌려야 열리고 닫혔으며 나무가 틀어져 열고 닫을 때마다 신경을 긁는 삐그덕 소리가 났다. 한 번에 닫히지도 않아 창문을 들었다 놓는 느낌으로 여닫아야 했다. 티브이는 브라운관으로 다행히 리모컨은 되는 모델이었고 좁은 거실에는 소파가 없어 등을 대고 앉을 때 기대는 벽의 벽지는 머릿 기름이 닿아 누랬다. 에어컨도 건조기도 스타일러도 당연히 없었다. 수압이 약해 화장실 물은 졸졸 나왔으며 보일러도 오래돼 씻다 보면 에러가 떠 찬물이 쏟아졌다. 지속은 병히와 서울 좋은 곳에서 놀고먹고 구경을 하다 연립의 계단을 오르면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를 떠올리곤 했다. 참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지속의 부모는 왜 가난을 못 벗어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흙수저는 열심히 일해도 마이너스 삶이라던데 지속은 누가 자신의 집을 훔쳐본 것처럼 그 말에 뜨끔했다.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을 병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속은 어린애처럼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울고 불며 때를 썼다. 그런다고 없던 돈이 생길 리가. 아빠는 오랜 고민 끝에 이사는 무리고 대신 인테리어 공사를 하자고 했다. 지속은 아빠의 말에 울다가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네 식구와 반려견 쫑이는 두 달 동안 원룸살이를 시작했다. ! 1.5룸이긴 했다. 종부는 코를 심하게 곤다는 이유로 신발장 앞에서 신발과 함께 잠을 잤다. 지속은 자신의 고집으로 가족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엄마는 원룸의 옵션 드럼세탁기를 처음 써본다며 좋아했고 물이 폭포수처럼 나와 씻기 좋다고 했다. 에어컨도 있어 시원했고 좁은 것만 빼면 살던 집보다 좋아 공사가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딸 지속을 시집보내겠다고 집도 뜯어고치고 온 집안이 난리였다.

새로 고친 집은 섀시를 새로 해 웃풍이 불지 않았고 확장을 해 거실엔 작은 소파도 놓을 공간이 생겼다. 깔끔한 집에 새로 산 가전제품을 채우니 살만한 공간이 되었다. 엄마는 냄새나던 화장실을 고치고 싱크대를 갈아서 살 것 같다고 신나 했다. 병히는 인사를 하러 와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가 깔끔하다고 했다. 그 말에 지속은 옛집을 떠올리며 웃었다. 병히가 옛날 집 봤으면 폐가 비주얼에 놀라 자빠졌을 테니.

이런 과정을 거쳐 결혼을 한 지속은 병히가 구한 지은 지 3년 된 나름 신축 축에 드는 아파트 전세로 신접살림을 차렸다. 24평에서 네 식구가 복작이며 하나뿐인 화장실 선점 싸움을 하다가 30평대 화장실이 두 개인 집에서 병히와 단둘이 지내니 집이 궁궐 같았다. 브라운관 티브이 앞에서 리모컨 싸움을 하다 60인치 시원한 화면으로 종일 보고 싶은걸 보니 꿈만 같았다. 병히 덕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다가 전망까지 훌륭한 집에서 사니 지속이 꿈꾼 한 뼘 좋은 삶이 아닌 팔자가 뒤집어진 삶이었다. 이쯤이면 또 그 타이밍이 왔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병히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불쾌함이 스멀스멀 지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병히와 그의 가족들은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길 뿐 지속에게 고기 한점 주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리라.

결혼 후 병히는 지속에게 혹시 영어학원을 차려주면 할 수 있냐 물었다. 지속은 이게 웬 떡이냐며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투자할 생각인지 묻자, 병히는 이런 짧은 대답을 했다.

"내가 무슨 돈이 있어? 아빠가 물으시더라고."

오! 아버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딸이 되어드립죠. 지속은 잔뜩 신이 나 어떤 체인의 학원을 차릴지 고민하느라 밤잠까지 설쳤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속은 원장님이 됐을까? 그럴 리가. 그냥 의사를 묻는 것으로 더는 진전이 없었다. 지속은 김이 팍 샜다.

그로부터 얼마 뒤 면허가 없던 지속에게 시어머니가 자동차 면허를 따라고 했다. 면허를 따면 시아버지가 지속이 차를 한대 뽑아준다고 했다며. 그 말에 지속은 바로 면허를 땄다. 어떤 차를 뽑을지 대리점에 가서 상담까지 받았다. 지속은 이번엔 차를 받았을까? 그럴 리가. 뽑아준다던 차는 지속이 임신을 하고 원이가 태어나 어린이집에 입학할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고 그렇게 지속은 장롱면허가 되어버렸다. 그쯤 되자 지속은 노처녀 원장이 사준다던 냉장고를 떠올렸다. 원장은 냉장고를 빌미로 지속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시댁 식구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지속은 고기를 줄듯 풍기는 냄새에 이골이 , 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고기를 굽던가 말던가. 지속은 당장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소중했다.

가만 보니 병히도 그랬다. 연애시절 비싼 명품백 사진을 보여주며 지속에게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지속은 맘에 든다고 사주려고? 물으면 병히는 네가 들면 예쁘긴 하겠다고 모호한 답을 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사진 속 가방은 현물이 되어 지속에게 오지 않았다. 지속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취향을 물어본 것이니 하지만 시부모의 태도는 좀 언짢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속에게 극진한 효심을 바라셨나? 왜 주지도 않을 금화가 든 궤짝을 발로 차서 짤랑거리는 소리만 내는지 의문이었다. 정말 금은 맞고? 깨진 유리 조각 아니고?

지속은 다시금 자신의 태생을 떠올렸다. 가진 거 없고 가난해도 자존심 있는 꼬장꼬장한 삶을. 굶주려 잠깐 고기 냄새에 혼미해진 정신을 붙잡고 되뇌었다.

이지속!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지속은 혼자 먹을 라면을 시가에서 냄새를 폴폴 풍기며 신나게 끓였다. 냄새 죽이지? 먹고 싶지? 고기나 많이 드세요. 지속은 꼬들한 라면을 후루룩 쩝쩝 맛나게 먹었다. 고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양껏 배가 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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