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은 원이를 낳고 기르며 시간이 네 배속으로 흐른다고 느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예고편이고 육아는 본 게임이었는데 아무리 죽어라 레벨을 깨고 올라가도 최종 보스는 구경도 못했다. 뭐?! 육아의 최종 보스를 보려면 20년이 걸린다고? 뭐?! 그러다 한 십 년 쉬면 손주를 보는 황혼육아 최 최종 보스가 나온다고?? 이제 막 24개월이 된 원이의 얼굴은 보던 지속은 자신이 아직 부팅도 제대로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속은 원이를 키우며 짐승으로 태어나 부모의 뼈와 살을 깎는 인고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야경증으로 새벽녘 비명을 지르며 깬 원이는 두 시간을 악을 쓰며 몸부림을 치다, 울다 지쳐 제풀에 잠이 들었다. 지속은 원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랑으로 키운 원이는 뽀얗고 예쁘게 크는데 지속은 시들어갔다. 육아는 지속에게 황금 족쇄였다. 발목을 조여 아프고 무겁고 힘든데 가치가 엄청나 풀고 도망갈 수 없었다. 제법 이제는 사람같이 말을 하는 원이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로 지속을 웃게 만들었는데 28개월쯤 원이와 같이 목욕을 하다, 원이가 엄마 찌찌는 왜 팔랑팔랑 해요? 물었다. 한창 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는 내용의 동화책을 주야장천 읽어줬는데 원이의 표현에 이마를 탁 치며 웃고 말았다. 그래 나비의 날개처럼 한없이 가볍긴 하지. 좀 더 자라 더욱 사람같이 말하면 육아도 할만해질 텐데.....
그날이 오기는 할까. 지속은 눈앞이 아득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뿔싸. 지속은 또 임신을 했다. 코로나로 요가학원이 휴강을 하고 병히가 테니스도 쉬면서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는 날이 많아지자 생긴 사건이었다. 원이를 재우고 병히와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과음을 한 것이 문제였다. 왜 병히가 잘생겨 보였나. 지속은 임신테스트기에 생긴 두줄을 보고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싶었다. 아직 원이도 어린데 지속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난소 절제술을 받아 분명 임신이 어렵다고 했는데 지속의 난소는 반으로 갈라졌어도 제 역할을 끄덕 없이 해냈다.
병히는 지속의 임신소식에 좋아했다. 하긴 지가 낳는 것이 아니니 좋겠지. 지속도 병히가 임신했다면 기뻐서 쌈바춤을 추었을 텐데. 또다시 임신과 출산, 신생아를 키울 생각에 숨이 막혔다. 솔직히 원이에게 형제를 만들어주고 싶긴 했다. 그런데 막상 그 힘든 과정을 또다시 겪을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어쨌든 36살 노산이었던 지속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찾아온 생명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진이를 만났다. 제왕절개로 만난 진이는 작고 미모까지 이미 완성형이었다. 자매를 둔 지속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나중에 크면 사춘기를 보내고 군대도 다녀오고 지밥벌이까지 하는 다 큰 남의 집 아들을 데려올 테지. 지네 엄마한텐 별 지랄을 다 떨어놓고 장모한테는 예의를 갖출 미래의 듬직한 사위를 둘이나 볼 테니 뭔가 남는 장사 같았다. 지속은 자신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했다. 뭐 시집을 안 가도 좋았다. 두 딸과 재미지게 노년을 보내면 될 테니. 낳기 전엔 걱정이 많았는데 낳고 보니 비로소 행복의 퍼즐이 완성됐다.
그런데 지속만 자매를 둔 것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병히의 생각은 달랐다. 병히는 봉기가 그랬듯 헤어진 연인에게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끔찍한 사건의 기사를 코멘트 없이 보냈다. 집에 젊은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묵언의 시위였다. 지속은 퇴근한 병히를 불러 앉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두 번째 마누라한테 아들 낳아달라고 해"
"두 번째라니 무슨 소리야?"
"나랑 이혼하고 아들 낳아줄 여자랑 재혼하라고"
지속은 노산으로 진이를 낳으며 갖은 고생을 했다. 전치태반으로 자연분만이 불가능했고 고위험군 산모로 병실에 입원한 지속의 이름에만 형광펜이 그어졌다. 비싼 알부민을 여섯 병을 때려 맞고도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원이는 거저 낳았고 진이는 힘들게 낳았다. 수술 후 생긴 한 뼘 길이의 수술 자국은 볼 때마다 지속을 우울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진이가 태어난 것 말곤 좋을 게 없었다.
그런 힘든 출산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건만 세상에 아들 타령이라니!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속은 병히의 노골적인 바람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렇게 예쁜 딸이 둘이나 있는데 아들을 바라는 건 엄청난 욕심 아니던가. 셋째를 낳다 지속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병히를 저주하겠다고 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2022년 38살의 지속에게 병히는 마흔전까지 아들 출산을 도전해보자는데 할말을 잃었다. 셋째가 아들이란 보장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