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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과 일과

그리움

좋은 문장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

by 류정은


여전히 좋은 문장을 보면

지영언니가 생각난다.

이 아름다운 문장을 청취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사람들이 좋아할 텐데. 그전에 언니가 방긋 웃으며 원고를 예독해 주겠지. 매일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손에 쥐고 강조할 부분과 부드럽게 빠져나갈 부분을 구분하며 줄을 긋겠지.

방송이 끝나면 나는 재빨리 스튜디오로 들어가 언니의 원고를 챙겨 나온다. 후루룩 펼쳐서 어디에 동그라미를 쳤는지, 고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다. 신청곡을 뽑아서 프린트 한 종이도 어디에 별표가 있는지 본다. 매일 취향을 확인하며 맞춰오길 5년이었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시간,


커다란 영광과 인생의 슬픔을 함께 겪으며

그 시간 모두 원고에 담았던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어 여러 청취자들에게 언제나 봄을 느끼게 하겠다.

피천득 선생님이 품에 안고 있던

난영이 이야기를 써놓고

언니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사에 도착도 하기 전에 카톡이 왔었다.


-나 난영이를 본 적이 있어..


-




일상 속에서 감탄이 나오는 순간을

모두 이해해 주는 디제이를 만나서

내 모든 순간이 원고에 적히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원고를 쓰면서 언제나 결말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반쯤 적어두면, 다음은 청취자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이


나의 보람이었다.



청취자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쉽게 결론짓지 않는 것

이야기를 하다 마는 나름의 원칙이 마지막엔 소용없었다. 오직 고백으로 끝냈다.


우리의 시간이 봄날이자 기적이었다고 말하며 문을 열고, 그 대상이 언제나 2인칭 (너) 뿐이었다는 말로 닫았다. 같은 작가의 책은 가까운 날에 인용하지 않지만 피천득 선생님과 김훈 선생님의 문장을 가져다가 썼다. 마지막 방송인데 아껴서 어디다 쓴담.



지금도 하찮고 좋은 걸 보면 언니가 생각난다. 아 이 순간을 천천히 묘사하고 싶은데... 언니가 있었다면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짧은 시간을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세밀하게 글로 그리는 시간이 그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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