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

겨울, 연말결산

by 소담


달력의 마지막 장을 남기면, 몸은 분주해지는데 마음은 오히려 평온해진다.

한 해를 정리하는 방식이 늘 같진 않지만, 내 연말의 대미는 대개 크리스마스 파티로 장식된다.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고, 그 여운까지 마무리하는 일.

그게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가장 큰 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가족여행과 크리스마스 연휴가 겹치면서 ‘여행을 갈까, 집에서 파티를 할까’ 마음이 오래 흔들렸다.

그때 아이들이 먼저 말했다.

“여행 가서 파티해도 좋을 것 같아.”

이색적인 파티도 좋겠다 싶어,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스키장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두꺼운 외투 안에는 따뜻한 공기가 고여 있고, 장갑을 벗자마자 손끝은 입김을 찾는다.

저마다 가족과 친구 곁으로 모여드는 풍경이 차가운 공기마저 포근하게 만들었다.

그 겨울 눈 위에서, 우리 가족의 연말이 시작됐다.


올해 파티는 ‘겨울답게’ 열렸고, 준비는 뜻밖에도 아주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집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음식을 준비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주하게 도왔을 텐데, 이번엔 내가 혼자 모든 걸 맡았다.

심지어 남편의 도움도 정중히 사양했다.


“토마토 마리네이드는 다섯 개만 담아줘.”

그런데 그는 “세 개면 충분하지 않아?” 하고 멈춰 섰다.

“카이막 치즈는 볼 세 군데로 나눠 담아줘.”

그러면 “두 군데만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또 멈춰 섰다.


그가 나를 쉬게 해 주려는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별 거창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딱 내가 그려둔 만큼’으로 연말을 완성하고 싶었다.


혼자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번엔 준비랄 것도 없이 간단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남는 건 와인 파티 세팅 정도였다.

‘파티 준비’라기보단 ‘파티의 마지막 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

무엇보다 한 번쯤은 내 손으로 단정한 와인 파티를 완성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챙기는 짐이 가벼웠던 건 아니다.

집을 떠나 파티를 해야 하니, 최소한만 챙긴다고 챙겼는데도 가방은 쉽게 불어났다.

“서빙 보드까지 가져간다고?” 남편이 한마디 던졌지만,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호스트는 나니까.

몇 날 며칠 머릿속으로 리허설을 돌려본 끝에, 내가 줄이고 줄인 준비물이 그 정도였다.


사실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친정오빠가 만들어준 서빙 보드 하나, 와인과 안주 몇 가지, 그리고 분위기를 살릴 미니 소품들.

다만 2박 3일 여행 짐에 ‘파티’라는 아기자기함이 덧붙여지니, 가방이 조금 더 무거워진 것뿐이다.

그 서빙 보드는 가로 90cm, 세로 30cm쯤 되는 크기다.

오빠가 서툰 솜씨로 세 개를 만들어줬는데, 하나는 더 길고, 하나는 더 얇다.

파티 때마다 번갈아 꺼내 쓰는 이 보드들은 이제 나의 최애템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게임에 몰두한 사이, 나는 조용히 테이블을 완성했다.

보드를 올리고, 와인잔을 닦고, 작은 소품을 제자리에 놓는다.

샤인머스캣과 블루베리, 루꼴라로 작은 리스를 만들고, 갖가지 치즈를 나름의 위치에 올려두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혼자 준비하는 시간은 일이 아니라 의식처럼 느껴졌다.

한 해의 끝에, 나를 다시 차분하게 만드는 작은 의식.


그리고 그 밤,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아 저마다의 한 해를 돌아보았다.

잘 버틴 날도, 웃었던 순간도, 아쉬웠던 일도, 고마웠던 사람도 이야기했다.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보고 싶은지 각자의 소망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누군가의 말이 잠시 멈춰도 재촉하지 않는 마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온기가 테이블 위에 남았다.


파티가 끝나고 모두 잠든 뒤, 잠깐 창밖을 보았다.

자정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키장은 여전히 환하게 눈부셨고, 설원을 가르며 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설레는 희망처럼 가슴을 채웠다.

그 고요 속에서 문득 알 것 같았다.

내가 연말마다 파티를 준비하는 이유는 ‘근사한 자리’를 위함이 아니라, 한 해를 잘 살아온 소중한 사람들을 조용히 안아주기 위해서라는 걸.


물레를 돌려 매끈한 형태를 빚어내듯, 우리의 파티도 해가 거듭될수록 마음을 잘 빚어 가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두 팔 벌려 마음껏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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