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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담 Aug 21. 2020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길

당근 마켓 입문자


 집에 창고처럼 쓰던 작은 방이 있다. 평수로만 보면 실제로 크기가 그렇게 작지는 않은데, 안 쓰던 물건 이것저것을 그 방에 놓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방에 사람은 잘 들어가지 않게 되고, 치우자니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오랜 시간 방치해놓은 그런 방이다.


 며칠 전 방을 치우고 서재로 활용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하고서 정말 오랜만에 그 방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큰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버려야 하는 물건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필요해서 가지고 있거나,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은 아니지만 추억이 담겨서 이사 올 때 차마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그 방에 가득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눈 나빠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며 엄마가 사줬던 led 스탠드, 미니언즈 영화에 빠져있을 때 조립해서 만들었던 미니블록들, 중학교 때 아빠가 출장 다녀와서 인도 화폐를 넣어 선물해준 빨간색 지갑과 같은 것들.


 모든 물건은 사소한 것이라도 세월을 함께 하다 보면 사연이 담기는 법이다. 특히 그것이 '어릴 때', '처음' 등과 같은 키워드와 연관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평상시엔 넣어 두고 잘 보지도 않으면서 괜히 마음이 아파서 버리지 못했다.


 하루가 꼬박 걸렸다. 방 안의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들은 작은 수납장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중 위에서 말한 led 스탠드와 같은 것들은 차마 내 손으로 못 버리겠더라. 그건 내게 단순한 스탠드가 아니라, 당시 넉넉지 않던 형편에도 나를 가전제품 샵에 데리고 가 그곳에서 눈에 좋다는 가장 신형 모델로 사 준 엄마의 사랑이었다. 고등학교와 재수생활 내내 불 꺼진 밤에도 그 조명 하나에 의지하여 많은 밤을 책과 씨름하며 지새게 도와준 나의 등불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친구가 얼마 전 어플을 깔고 시작해 잘 쓰고 있다는 당근 마켓을 깔았다. 내 손으로 버리기엔 차마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나 대신 필요한 누군가가 가져가서 잘 써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싸게 올린 덕인지 올리자마자 연락이 금방 왔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어머니였다.


 다음 날 직접 만나서 스탠드를 건네 드리고 왔다. 첫 거래라 걱정도 조금 했었는데, 어머니는 무척 친절하셨고, 내게 좋은 스탠드를 싼 가격에 내놔주어서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척 홀가분했다. 이제는 그 스탠드와의 좋은 추억만 남겨두고 서운하지 않게 잘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가 불안정해 보여서 고민하던 학창 시절 내게 등불이 되어준 그 스탠드가, 다른 아이의 삶에도 빛이 되어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당근 마켓에 입문하고 네 가지의 물건을 더 팔았다. 방에 묵은 먼지를 물걸레질로 닦아내고 가족들과 그 돈으로 치킨을 시켜 먹었다. 부모님은 세상 좋아졌다며, 진짜 창조경제네 하고 신기해하셨다. 이렇게 가족들과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추억은 언제든지 만들면 되는 거다.


 다만 한 가지 정말 처분하고 싶었는데 처분하지 못한 게 있다. 방 한쪽 면을 가득 차지하던 40년 된 피아노다. 40년 전 영창 피아노에서 고모가 사서 쓰다 내게 물려주신 그 피아노는 당시 매우 고가였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지만 커서는 거의 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 때마다 버리기엔 아까워서 데리고 다니던 것이 결국 내가 20대 중반이 된 지금의 집까지 왔던 것이다.



 지금의 집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이라 운반이 난감해서 가지고 있던 것인데, 계단으로도 돈을 조금 더 받고 운반해서 처분해주는 전문 업체가 있길래 연락했다. 대략적인 견적을 받고 자세한 건 와서 보시겠다고 하셔서 오셨는데 딱 와서 계단이랑 피아노, 베란다를 보시더니 '이거는 저는 포기할게요' 하셨다. 계단이 너무 좁아서 안 될 것 같고 난간이 있어 사다리차로도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피아노까지 처분했다면 마음이 정말 후련했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으니 피아노는 그대로 방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에 쳤던 악보를 꺼내 오랜만에 건반을 좀 눌러봤다. 버리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가지고 있을 동안 정을 붙이는 수밖에.


 필요 없는 물건들과 가구들을 치우고 나니 넓어진 방을 보면서 서재로 만들기 위한 구상을 했다. 어두운 회색빛의 커튼도 바꾸고 싶어 아이보리색 커튼을 새로 주문했다. 직사각형 러그와 우리 가족 셋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실만한 원형 테이블도 주문했다. 오늘 배송이 오기로 해서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방 청소를 다 끝내고 새로운 가구들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에어컨을 켜고 일을 했음에도 덥고 습한 날씨에 땀이 줄줄 흘렀다. 샤워하고 나와 비빔국수를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입맛 없고 더운 여름에는 매콤 새콤한 비빔국수만 한 것이 없다. 신김치를 잘게 잘라 설탕에 버무려 고명으로 올리면 식감도 좋고 간도 맞다.



 

늘 창고처럼 방치되어 있는 방이 마음의 짐이었는데, 한 번 마음먹고 정리하고 나니 얼마나 속이 후련한지 모른다. 이번에 방을 치우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 하는구나 했는데 이게 얼마나 갈런지. 미니멀리즘의 길은 너무 어렵다.


 오늘 밤은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후련하니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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