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서쪽에 죽은 자를 위하다
이집트의 경주, 룩소르
룩소르는 이집트에서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이다.
역대 파라오들의 무덤이 있는 왕가의 계곡부터 제각각 설립 목적과 특징들이 다양한 신전까지.
수천 년 전부터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유적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산 자의 땅, 죽은 자의 땅
룩소르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서쪽을 죽은 자의 땅, 동쪽을 산 자의 땅이라고 불렀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은 태양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짜여 있고,
해가 동에서 서로 뜨기 때문에 동쪽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신전, 시장, 궁전 등을 짓고,
서쪽에는 죽은 자의 무덤, 장제사원, 왕가의 계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룩소르를 관광한다면, 동안/서안 투어를 각각 하루씩 나누어 진행하거나
시간이 부족한 경우는 하루에 전부 진행하는 투어도 있었다.
원래도 강경 자유여행파이고, 여행 중간중간 투어를 많이 끼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이집트가 이동이든 유적지/유물에 대한 설명이든 누군가의 가이드 없이 관광하기 어려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투어 예약이나 기사 섭외를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다.
기사를 미리 구한다 해도 유적지에 대한 설명까지 포함된 경우는 드물었고,
가이드가 포함된 투어를 예약하더라도 설명의 퀄리티가 낮거나 관람 시간이 촉박한 문제로 인해 좋지 않은 후기의 비중도 꽤 높았기에
숙소에서 그나마 먼 서안도 택시로 못 갈 거리는 아니라서 그때 그때 택시를 잡기로 하였다.
어쩌다 프라이빗 투어
룩소르에서 2박이기에 짐을 쌀 필요가 없어 여유롭게 일어나 조식을 먹은 후 10시쯤 인드라이브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서안 투어가 가볼 곳이 더 많고, 둘째 날은 저녁에 후르가다로 이동해야 했기에 첫째 날은 서안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는데, 마침 우리 앞에 한 택시가 멈춰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 일본인 2명을 내려 줬다.
우리가 택시를 기다리는 듯 보이니 갑자기 기사가 우리 쪽으로 와서 목적지가 어딘지 물어보고, 본인이 오늘 기사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왕가의 계곡을 가고 싶다고 하자 기사가 서안에서 주로 관광하는 유적지들을 나열하였고, 800파운드(24,000원)에 하루 종일 데리고 다녀준다고 하였다.
우선 가격도 합리적이고, 유적지간 이동마다 택시를 부를 생각에 아득한 마음도 있었는데 솔깃하였다.
조금 더 확실히 하고자 우리가 그날 가고 싶었던 유적지 (멤논 거상, 왕가의 계곡, 하트셉수트 장제전, 메디넷 하부, 룩소르 신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고, 마침 우리가 부른 인드라이브 기사도 우리가 입력한 목적지에 가려면 제시한 금액보다 더 지불해야 한다고 메신저가 와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나가던 기사님의 차에 탑승하였다.
이 기사님은 다음날 동안투어도 함께하게 되는데,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혹시 바가지를 씌우면 어쩌지, 관광시간을 너무 조금 주면 어쩌지, 우릴 어디다 팔아넘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은연중에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오래 관광을 하든, 갑자기 밥을 먹고 싶다고 하며 중간 경유지를 추가하든 재촉 한 번 없이 기다려 준 착한 기사님이었다. 심지어 차도 크고 깨끗했으며 무려 에어컨도 가동이 되는 슈퍼카였다.
이집트에서는 에어컨만 돼도 슈퍼카 타이틀을 붙일 만하다.
아무튼 착하고 좋은 기사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미리 룩소르에서의 이동 수단을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해 짊어져야 할 업보는 어떤 대가도 없이 청산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집트는 거의 모든 유적지가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관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체력과 햇빛/자외선 차단 용품이 필요한데,
특히나 왕가의 계곡이 관광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장소여서 그나마 오전, 제일 첫 번째 목적지로 방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룩소르 기사님이 지금 가서 관광을 시작하면 점점 더워질 거고 슬슬 관광객들이 많이 몰릴 타임이기 때문에 다른 곳을 먼저 들렀다가 방문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제안을 하셨다.
단순히 의견이고 왕가의 계곡부터 가겠다고 하면 본인은 상관없다고 하시는 말투와 표정에서 어떤 다른 목적이 보이진 않아 기사님의 의견대로 경로를 수정하였다.
첫 번째 서안 투어지, 멤논 거상
그렇게 서안 투어의 첫 번째 방문 장소는 '멤논 거상' 이었다.
멤논 거상은 기원전 14세기경 아멘호테프 3세 통치기에 만들어진 석상으로 원래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사원 정문 앞에 세워져 파라오의 사후세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으나, 지금은 장제사원 대부분이 나일강의 범람으로 파괴되어 입구를 지키던 이 두 석상만 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 서안 투어지, 메디넷 하부
다음으로 '메디넷 하부' 신전으로 이동하였다.
메디넷 하부는 람세스 3세의 장제사원인데, 단순한 신전이 아니라 신전+궁전+요새+제사구역이 결합된 복합 유적지로 왕이 죽은 뒤 제사와 신격화 의식을 위한 사원인 '장제사원' 이면서도 군사적 방어시설처럼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람세스 3세는 신왕국 시대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인데, 그의 통치기에 이집트가 해양민족의 침입으로 큰 위기를 맞았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장면이 메디넷 하부의 부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한 사원을 넘어 승전 기념비이자 왕의 영광을 기록한 역사서라고도 한다.
이런 내용들은 메디넷 하부를 관광할 당시에는 몰랐고, 후에 여행 기록을 작성하면서 챗지피티가 알려준 내용이다. 어쩐지 투어객들이 어떤 벽화를 다들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알았다면 나도 더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집트 여행은 공부의 양과 여행의 재미가 그리는 비례 곡선의 기울기가 그 어느 여행에서보다 가파른 것 같다.
메디넷 하부 등 서안에 있는 유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유적지와 다른 장소에 있는 매표소에서 방문하고자 하는 장소별 입장 티켓을 미리 구매해서 가야 한다.
이집트에는 이렇게 더운 날씨 때문인지 길가에 늘어져 있는 개들이 많았는데,
룩소르에서 유독 많이 본 것 같다.
언뜻 보면 죽은 것처럼 보여서 처음엔 굉장히 식겁했다.
세 번째 서안 투어지, 하트셉수트 장제전
다음으로 '하트셉수트 장제전'으로 갔다.
하트셉수트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파라오로 꼽히는데,
투트모세 3세의 의붓어머니였지만, 왕이 어릴 때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스스로 여성 파라오로 즉위하였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사막의 절벽과 완벽히 하나가 된 신전'으로도 유명한데,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여왕의 신격화와 정당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예술적 선언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하트셉수트는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라오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남성 파라오의 복장과 가짜 수염을 착용하고, 조각상에서 남성의 신체로 표현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입구에서 유적지까지 조금 걸어가야 했는데,
돈을 받는 줄 알고 따로 카트를 타지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무료 셔틀인 것 같았다.
그저 그 날씨에 무료 셔틀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유적지까지 간 여성들이 되었다.
하지만 위 설명에서도 기재하였듯이 사막의 절벽과 하나가 된 형상이라 카트를 타고 갔다면 장제전까지 걸어가는 동안 느꼈던 장제전의 위엄을 느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입구에 스핑크스도 있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내부를 천천히 구경하는데, 아침부터 계속 땡볕에서 쉬지도 않고 유적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 때는 사람이 녹아내렸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정도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입자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웬만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해야 할 일은 끝내고 가는 성향인데, 이대로 조금 더 버티면 더위를 먹어 앞으로의 여행에 지장을 줄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장제전 내부에 있는 카페로 피신하였다.
에어컨이 없는 반 야외 공간이었음에도 햇빛을 막아주었다는 차이 하나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잠수를 하다가 빠져나와 숨을 쉬는 사람처럼 산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휴식을 갖고 장제전을 더 구경하다가 차로 돌아갔다.
휴식처가 된 알라바스터 공방
아무리 카페에서 조금 쉬었다고 해도 바로 왕가의 계곡에 가서 또 1시간 반~2시간을 땡볕에서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 스스로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데,
마침 다행히도 기사님이 근처 알라바스터 공방 겸 판매점에 데려가 주었다.
유적지간 이동하는 길에 알라바스터라고 쓰여 있는 가게들이 많아서 음식점일까 뭘까 궁금했는데,
석고로 이루어진 매우 고운 입자의 부드러운 돌인 알라바스터를 장인들이 수공예로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을 전시하고 또 판매하는 상점들이었다.
룩소르 서안에 있는 산지에서 주로 채취되기 때문에 이곳에 알라바스터 공방이 많은 것이었다.
기사님이 데려가 준 알라바스터 공방은 입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사장님이 가게 앞에 앉아서 수공예로 알라바스터를 다듬고 있는 그의 엉클, 커즌들을 설명하며 도저히 I 성향은 찾아볼 수 없는 텐션을 보여주었다.
오전에 관광을 하며 먹은 더위와 최근 며칠 동안 자주 멀미를 하며 뒤집히곤 했던 속은 멀쩡한 컨디션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 E 중에서도 가장 하이클래스의 텐션을 만나게 되며 가게 입장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화장실 타이밍을 재면서 설명을 한참 듣다가 ‘자, 이제 알라바스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줄게’ 라는 또 다른 멈출 수 없는 서막이 시작되려 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만 더 들으면 돼’ 라고 설득하는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 간신히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가게 외부에 보이는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가게 내부에 에어컨도 빵빵하고 더 좋은 컨디션의 화장실이 있다며 데려가 준 사장님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하게 조급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여전히 울렁거리는 속에게 눈치를 주며 생각보다 길어진 화장실 타임에 머쓱해하면서 밖으로 나가자 내가 오길 기다리며 설명을 멈춘 친구와 사장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Tea를 주겠다는 사장님에게 나는 마실 수 없다고 하자, 본인의 복부를 가리키며 트러블이 있냐고 물어보셨고 그렇다고 하였더니 그럴 때 좋은 티가 있다며 '아니스' 티를 가져오셨다.
처음 맡으면 적응이 쉽지 않은 독특한 향이었는데, 나는 나름 먹을만했고 무엇보다 티를 마신 후 몇 분이 지나고 나서 한 번 더 화장실 타임을 가졌는데 그 이후로는 이 몹쓸 병이 완치되어서 아니스 티에 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 막바지엔 아니스 티를 몇 개 사서 한국에 가져갈 정도였다.
아무튼 티까지 마시면서 알라바스터를 구경하는데, 사실 살 생각이 없었지만 만져보면 볼수록 표면이 정말 고와 매료되었고, 이때 '앙크' 에 미친 사람이었던 시절이어서 앙크 모양의 알라바스터에 또 현혹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 기념품 치고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알라바스터가 한화로 3~5만 원 정도였어서 친구와 한참 고민을 하다가 ‘룩소르만의 특산물’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앙크 모양의 알라바스터를 하나 구매하였다.
내 이름을 상형문자로 새겨준다는 사실에 더욱 혹한 것도 있다.
화장실에서만 30분 이상이 소요된 예상보다 매우 길어진 총 1시간 정도의 알라바스터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기사님이 가게 앞에서 땀을 흘리며 기다리고 계셨다.
안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있게 되어 신경이 쓰여 미안하다고 말씀드리자 정말 괜찮다는 식으로 대답하고 쿨하게 다음 장소에 가자며 차에 타셨다. 테토남이시다.
네 번째 서안 투어지, 왕가의 계곡
다음은 서안 투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왕가의 계곡'에 갔다.
왕가의 계곡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 파라오와 귀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의 무덤 지구로 죽은 자의 서쪽, 사후세계로 향하는 문턱으로 여겨졌다.
신왕국 이전 시대에는 왕들이 기자, 사카라 지역에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을 지었지만,
피라미드가 너무나도 눈에 띄다 보니 도굴 위험이 컸고, 그래서 룩소르 서안에 있는 산속, 숨겨진 계곡 안쪽에 무덤을 파서 보물을 지키고 영혼을 안전히 안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덥고 힘들었지만 이집트에서 본 유적지 중 나에겐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다.
제일 유명하고 기대했던 곳은 아부심벨이었으나 컨디션 이슈(멀미) 때문인지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생각보다 감흥이 크지 않았고,
거대한 산과 그 사이에 있는 협곡이 주는 자연적 위압감부터 그곳에 아직도 그대로 있는 수천 년 전의 무덤들이 주는 메시지는 역사와 상형문자를 몰라도 밀폐된 무덤 안에서 정말 그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아직도 저승에서 살아 있노라고. 우리가 말했지? 삶은 영원하고 우리는 저승에서 환생에 성공했어. 너희들은 세상을 이렇게나 바꾸고 그렇게 다른 차림새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구나. 신기하다.
그런 대화들.
이 왕가의 계곡에는 총 6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애초에 다 둘러볼 수도 없거니와 티켓에 관람 개수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어느 파라오의 무덤에 들어갈지를 미리 정해 오는 게 좋다.
기본권으로는 무덤 3개 입장이 가능하고, 특별권 구입이 필요한 파라오의 무덤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세티 1세, 투탕카멘, 람세스 3세가 있다.
세티 1세 무덤이 내부가 아름답기로 가장 유명했고, 그래선지 입장권이 2,000파운드(60,000원)로 이집트에서의 그 어떤 입장권 중에서도 가장 비쌌다.
친구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안 가보고 후회하는 것보단 가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세티 1세 무덤도 추가하기로 하였다.
가장 비싼 특별권 구매를
거부당하다
매표소에서 기본권에 세티 1세 무덤을 추가하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갑자기 세티 1세 무덤을 추가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었는데, 세티 1세 무덤이 입장권 가격에 비해 그 정도로 볼 만하진 않고 차라리 투탕카멘이랑 람세스 3세 무덤 입장권을 구매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한들, 매표소 직원은 더 비싼 가격의 입장권을 파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사실이 아니라 한들 굳이 세티 1세 무덤 입장을 막아설 이유는 또 뭐지?
정말 무덤 입장객 수와 입장권으로 발생한 수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조언을 해준 것일까.
처음엔 당황스러웠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 눈빛에 친구와 고민을 하다가 결국 매표소 직원의 말대로 기본권에 투탕카멘+람세스 3세의 무덤 입장권을 추가로 구매하였다.
입애굽기를 통해 여행 기록을 남기면서 드는 생각은 친구와 나는 정말 팔랑귀인 것 같다.
그래도 한 명만 팔랑귀면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아 다퉜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도 청소년증 할인이 안된다고 해서 여권에 몰래 팁을 끼워서 주고 학생가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심지어 매표소에서 그랬다. 허술하면서도 대범한 그들이었다.
이번에는 괜한 테토 부심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카트에 탑승하여 무덤 입구까지 이동하였다.
카트에서 내려 왕가의 계곡 쪽으로 이동하면 안내표지판에 지도가 있는데,
방문하기로 한 무덤 목록을 기반으로 이동 경로에 따라 순서를 정하면 되고
무덤 앞에 파라오의 이름이 쓰여있다 해도 찾는 게 어려워 조금 헤매면서 먼저 발견하는 곳부터 가게 되었다.
기본권으로 람세스 3세, 9세, 메렌프타의
무덤과 특별권으로 투탕카멘, 람세스 6세 무덤을 관람하였다.
메렌프타는 내부가 굉장히 신성하고 아름다워서 인상 깊기 때문에 챗지피티가 꼭 마지막에 방문하라고 하였는데,
무덤을 잘 못 찾다가 메렌프타가 보여서 그냥 먼저 방문했고, 들었던 것만큼 그렇게 특별하진 않아서 오히려 중간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마지막에 가겠다고 무덤 앞까지 도착한 걸 다른 무덤을 찾아서 돌아갔다 오면 더위에 지쳐서 더 아름답게 보였을 것도 흐리게 보였을 것 같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특히 유명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기 때문이다.
파라오들의 미라는 현재 22구가 카이로의 문명박물관에 있는데, 투탕카멘의 미라만 이곳 왕가의 계곡 무덤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무덤의 내부에는 특히 천장 쪽에 별모양과 사신 같은 사람 모양이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에서 환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사후세계의 안식을 보장해야 했던 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룩소르에서의 첫 외식, 또 양고기
왕가의 계곡까지 투어를 마치고 드디어 식사를 하러 갔다.
양고기 무새 친구가 어김없이 기사님에게 양고기 맛집을 추천받아 그곳으로 갔다.
친구가 원하는 양갈비 느낌의 요리는 없었고 양고기 조림 같은 게 있어 그 메뉴랑 소고기 요리를 시켰다.
나는 고기요리보다도 가운데 항아리에 있는 쥬키니 요리와 우측의 시금치 요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 때도 더위를 먹어서 크게 입맛은 없었는데 시금치 요리는 싹싹 긁어먹었다.
뷰가 좋은 식당이었다.
밥을 먹고 우리를 룩소르 신전에 내려준 후 기사님은 집으로 가셨고,
이때가 오후 5시쯤 되었는데, 룩소르 신전은 야경이 예쁘다고 해서 근처를 좀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신전에 가기로 하였다.
강을 따라 걷다가 근처 시장에 갔다.
더는 쓸데없는 기념품을 사지 않겠다 다짐하였음에도 파우치 3장에 100파운드(3,000원)이라는 소리를 지나치지 못해 파우치 1개, 앙크반지 1개, 작은 요술램프 모형 1개를 구매한 뒤에야 시장을 나올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남아서 룩소르 신전 앞의 맥도날드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다가 해가 질 때쯤 신전으로 갔다.
첫 번째 동안 투어지, 룩소르 신전
룩소르 신전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대표적 신전 중 하나로, 서쪽 왕가의 계곡과 달리 살아 있는 사람과 왕권을 위한 신전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왕이 신 아몬과 함께 의식을 치르는 장소인데, 신전 입구에 있는 한 쌍의 오벨리스크 중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고, 한 개는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가 약탈한 건 아니고 이집트 정부에서 선물로 주었다고 하는데, 로제타석을 통해 상형문자 해석에 큰 도움을 준 프랑스에 대한 고마움으로 선물했다고 한다.
아무리 고마워도 자국의 국보 중 하나인 유적을 떼서 주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유적과 유물이 사우디에서 기름 나듯이 나는 곳은 혹은 문화적인 차이로 그것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정말 많은 유적을 관람한 날이었고,
순간당 더위의 강도는 아닐 수 있어도 그날 총 받은 더위량은 이집트 여행 중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체력과 배경지식이 아쉬웠음에도 유적이 주는 위엄 자체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 특히나 달콤한 날이었다.
단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수천 년 전 고대의 그들과의 대화를 현대 문명이 이룩한 최신 장비로 포착한 결과물로써 한 번 더 하루를 복기한 뒤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