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흔히 서양 떡이라 불리는 음식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곡식 가루와 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불에 익히는 음식으로 국립국어원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일반식을 빵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식보다는 간식으로 구분된다.
‘빵’이 순우리말 같지만 보기와 달리 포르투갈어 ‘팡데로(Pão-de-ló)’에서 온 외국어다. 18세기 일본인들은 ‘팡데로’를 ‘팡(パン)’으로 읽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식 발음인 빵이 됐다.
처음 빵이 한국 땅을 밟은 건 19세기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그러나 보편화되지는 않았는데 조선의 밀 생산량이 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빵이 조선에 퍼지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이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이주해 오게 되면서 개항지 중심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로 인해 차츰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늘어났고, 그중에는 화과자 점도 있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빵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이 됐다.
앞서 말했지만 조선은 밀 생산량이 극히 낮았다. 그러나 쌀 수탈로 생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으로 막대한 양의 밀가루를 들여오게 된다. 1934년 가다 나오지(賀田直治)가 작성한 ‘조선공업조사기본개요(朝鮮工業調査基本槪要)’에서는 조선의 연간 밀가루 수요를 200만 포대 정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식량난으로 인해 빵뿐 아니라 다양한 밀가루 음식을 먹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잠시 살펴봐야 할 화과자 점이 있는데 군산의 이즈모야(出雲屋)다. 이즈모야는 1920년 히로세 야스타로(広瀬安太郎)가 만든 가게다. 이즈모야는 꾸준히 운영됐지만 1945년 조선이 해방을 맞게 되면서 적산가옥이 된다. 이를 인수한 건 이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었다. 이즈모야라는 일본식 이름을 내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재개업하게 되는데 바로 이성당(李盛堂)이다.
1960년대. 빵은 대량생산시대가 열린다. 이와 더불어 정부에서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혼분식장려운동을 실시하면서 밀가루 음식과 더불어 빵의 소비가 크게 들어난 시기다. 이때 성장한 대표적인 공장이 상미당(賞美堂)과 영일당 제과다.
상미당은 익히 알고 있는 삼립식품과 샤니의 전신이다. 특히 샤니는 파리바게트라는 프랜차이즈의 성공과 함께 굴지의 제빵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영일당 제과는 크라운 제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1988년 국내 1호 프랜차이즈 빵집인 크라운 베이커리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파리바게트와 CJ의 뚜레쥬르에 밀리면서 2013년 9월을 마지막으로 사업을 종료하게 된다. 현재는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제빵보다는 과자류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1970년대는 공장제 빵과 함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억의 빵집들이 골목골목에 자리 잡았던 시기다. 정겨운 동네 골목 한 켠에는 따뜻한 빵집이 하나씩은 있었다.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연인과 데이트 장소로, 어떤 이에게는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곳으로 이용됐다.
모두의 추억이었던 빵집이지만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밀리면서 차츰 문 닫게 됐고, 오늘날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그나마 대전의 성심당, 통영의 오미사 꿀빵, 전주의 풍년제과 같은 지역 빵집들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참고 자료
1.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2. 네이버캐스트, 한국 빵의 역사(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