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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삶에 남긴 확실한 증거

어떤 학위

by 서윤재

대학원에 가게 된 계기는 10년 이상 알고 지낸 전회사 사람들이 대학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로 혼자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했는데,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결혼도 했고, 회사일도 바쁘니까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낮아서 나한테까지 그들의 시간을 나눠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지인들이 모두 대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같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공부는 해두면 나쁠 것이 없는데다가, 석사과정을 하면 스펙도 되고 도움이 되겠지 싶어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스무 살 무렵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불안하고 예민해서 그 시기를 버텨내는 것이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였는데, 그 때의 나는 불안을 만들어내는 공장같아서, 모든 것에 불안해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버거웠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과 타인들로 인해 불안했고, 졸업을 할 때쯤 되어서는 미래에 대해 불안했다. 그래서 그 시기를 제대로 못 누린 것 같다. 대학교는 나한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장소가 아니어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그 쪽으로 발길도 주지 않았었다. 졸업 후에는 두번 다시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30대 후반에 내 발로 대학에 다시 가기로 했다.



20년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대학에 가니, 과거에 불안했던 대학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강의를 들을 때, 도서관에 갈 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여전히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경험치가 쌓여 불안할 때마다 스스로 '괜찮아, 긴장풀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20년 전에는 아무리 해도 안되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되었다. 현재의 내 모습이 불안했던 과거의 내 모습과 겹칠 때마다, 과거의 나에게 '괜찮아, 긴장 풀어.' 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 한켠으로 밀어두었던 대학시절의 무채색의 나를 꺼내 괜찮다고 말해주니 그제서야 과거의 얼어붙어 있었던 나에게 색깔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덕분에 과거의 대학시절을 꺼내 마주하고 그 시절을 너무 힘들고 불안해했던 곳으로 남기지 않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대학원 진학으로 인해 오랫동안 방치했던 과거의 대학시절의 기억을 오랫만에 꺼내 덜 힘든 기억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대학교 캠퍼스는 조경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학교에 갈 때마다 예쁘게 관리된 꽃과 나무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관리가 잘 된 조경이 아무나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니 누군가가 준비한 예쁜 캠퍼스에 감사했다. 예쁜 조경과 공부에 최적화된 쾌적한 환경을 학교 밖에서 누리려면 비싼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학교에 돌아오니, 대학교 안 어디에나 있는 빈 의자나 콘센트가 있는 빈 책상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낸 등록금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런 시설이 제공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반적인 대학교들은 재정적 여건이 넉넉하지 않고, 수익 기반이 취약하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쾌적한 공간들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사회생활을 하고 학교에 오니 보이게 된 것이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아주 오랫만에 단체생활을 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원은 학문도 중요하지만, 인맥도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학생들간의 네트워킹이 활발했다. 첫번째 대학생활에서 나는 늘 혼자였고, 모든 것을 혼자 했었는데, 새로 입학한 대학원에서는 모든 것을 다른 대학원생들과 함께 했었다. 학회나 워크샵도 같이 가고, 스승의 날이나 졸업식 행사 같은 학과 내 주요 행사에 모두 함께 했었는데, 오랫만의 단체생활이라 그저 즐거웠다. 대학원생들은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굳이 수많은 인생의 선택지 중에서 학위를 취득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라서 모두 열정적이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친절하셨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나는 거의 막내뻘이었는데, 막내뻘임에도 긴장을 하고 얼어붙어 있던 내게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나는 매주 학교에 가는 것이 기대되었다.



학교에 가면 수업 중간중간에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는 것들이 즐거웠다. 같이 수업도 듣고, 과제도 하고, 학위과정 얘기도 하고, 교수님 얘기도 하고, 학교 밖에서의 각자의 일 얘기도 했었는데, 직장 동료들하고는 할 수 없는 주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앞서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 시간들이 참 소중하고 행복했다. 단조로운 내 일상에서는 대학원이 아니었더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회사에서는 그저 오늘 하루 잘 마무리하고 퇴근이나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대학원에서는 졸업하면 미래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떠올랐다. 나의 한계를 확인하고 오는 것이 회사였다면, 대학원에서는 내 한계가 어디일까를 고민하다 왔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논문을 쓰는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논문 작성 부담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망설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논문을 쓰는 과정이 의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석사학위 논문이라는데, 그 당시에는 석사학위 논문이 내 세상의 전부여서 나는 어지간히 그것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부담이 되었다. 석사논문이지만 인정의 욕구가 튀어나와 교수님과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잘 썼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기 때문에 실력도 안되면서 어지간히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었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면서 학위논문을 작성해야 했는데, 그 시간동안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직장에서 보내는 근무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논문 작성에 할애했는데, 어떤 날은 노트북을 회사에 들고가서 점심시간에도 카페에 앉아 논문을 작성하고는 했다. 그 때의 나는 정말 최선을 다 했는데, 그 때의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30대에 직장생활 외의 무언가를 하면서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좋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의심으로 시작해서 결국에 끝을 내는 그 작업을 통해 내 안에 뭔가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30대는 늘 분주했지만, 어떤 자국이나 흔적이 남지 않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자문할 때마다 그 물음에 답해줄 증거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논문과 학위는 나를 구성하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질문에 증거가 되어주었다. 30대에 열과 성을 다했던 것이 물리적인 실체를 갖는다는 사실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확실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내 삶의 대부분은 불확실한 것들로 구성되어있는데, 논문과 학위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확실한 내 것이었다.



학위논문을 쓸 때 다짐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을 괴로운 일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논문을 쓰는 과정이 어렵고 힘든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 과정은 언젠가 끝나게 될 것이니 끝나고 나서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도록 이 과정을 반드시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쏟아붓고 나중에 이 경험을 다신 꺼내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확실히 쏟아붓고 나중에 내가 그때는 최선을 다했었지 하고 돌아볼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설프게 쏟아붓고 나중에 마치 시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른척하는 경험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런 경험을 더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 지구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내 석사학위 논문이지만, 이 논문 덕분에 나는 분명히 더 커지고 깊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논문작성 외의 부분에서는 어려웠는데, 그 어려움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기인했다. 사회생활을 통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나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음지에 사는 이끼마냥 가만히 있는 것을 택했었다. 누군가 나를 적대시하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무해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보인척 연기를 해왔다. 어이없게도 나보다 어린 여자선배님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아무리봐도 내가 그들보다 나은 게 없어보이는데, 나를 견제하면서 내 험담을 했다. 후배로 들어온 내가 멀뚱멀뚱하고 싹싹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가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랫만에 받아보는 적대감이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바보인척, 무해한척을 하기 때문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면 받았지 적대감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유없는 적대감에 그들이 내 존재를 신경쓰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오히려 기분이 좋기도 했다.



또한, 지도교수님이 어려웠다. 다른 학생들을 보면 교수님을 살뜰히 잘 챙기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학원 세계는 하나의 작은 사회였는데, 직장과는 다른 결의 대학원세계가 어려웠다. 좋은 사람들이 한가득해서 나는 매주 학교에 가는 날을 기다릴 정도로 좋아했지만, 교수님과의 사제관계는 어려웠다. 다른 선배님들을 보면 교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고, 교수님을 정말 존경한다고 하는데, 나는 지도교수와 제자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과 내에서는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자주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런 방식은 내 성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스러운 채로 남았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 중 하나는 오랜 지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원에서 나는 오히려 그들과 멀어졌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고마움을 느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관계가 내가 일방적으로 맞춰야만 유지된다는 사실을 대학원 생활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친구가 많지 않았던 나는 그 무리 속에서 안정감을 얻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추는 일은 점점 버거워졌고, 결국 나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오래된 관계라 그 선택은 마음이 아플 만큼 힘들었지만, 계속 머무르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 모임은 모두 같은 학교 대학원생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리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심하고, 박사과정 진학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박사과정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나를 위축시키고 작게 만드는 불편한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었다.



박사과정을 곧바로 진학하지 않는다고 밝혔을 때, 좋아하던 대학원 선배님께서 그러셨다. '학교 다니기 힘들었을테니까 쉬면 당장은 좋겠지. 그런데 너가 박사과정을 밟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니?'라고 물으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석사학위를 졸업하고 인간관계나 교수님으로부터 피해 도망치는 동안 나는 박사과정을 밟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박사과정에 진학했더라면 수업이라도 들었을 것이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서 뭐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박사학위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무거워 진다. 석사과정에 진학하면서 생긴 학자금 대출의 무게가 조금 줄어들고,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져서 다시 인간관계에 부딪혀볼까 하는 용기가 생기면 언젠가는 박사과정에 도전하고 싶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원에 입학을 결심했을 때에는 학위를 취득하여 강의와 저술활동 등을 통해 학위를 취득할 때 까지 든 학비 그 이상을 뽑아먹으리라 다짐했었지만, 석사학위 가지고는 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대학원에 다니면서 알게 된 교훈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석사들이 있고, 그 위에는 수 많은 박사들이 있다. 괴물처럼 석사 2개 이상, 박사 2개 이상의 복수 학위 취득자들도 굉장히 많다. 석사학위로는 강의를 할 수도 없고, 일자리를 구하려는 경쟁도 굉장히 치열하기 때문에 그냥 회사에 다니는 것이 제일 속편한 일이겠다 라고 생각한 것도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알게 된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 결국 석사학위 취득으로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바뀌어서 대학원 입학 전과 대학원 졸업 후의 내가 많이 달라졌다. 등록금의 가치는 내 안에서 조용히 실현된 것 같다. 그나저나 논문을 작성할 때에는 내 논문을 끝까지 완성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해야된다는 사명감이 들었는데, 졸업을 한 지금은 내 논문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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