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오현주가 정다은에게

by 에이포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신촌의 밀크티가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 ‘클로리스’였다. 인터뷰에 앞서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가 쓴 글 세 편을 내리읽는다. 편안한 소파만큼이나 편안한 글들. 글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결코 부드럽고 따뜻하지만은 않지 만, 그녀의 글은 술술 편하게 읽힌다. 마냥 글을 ‘잘’ 쓰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 편안함 의 발원을 찾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인터뷰에 앞서 그녀의 글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인터뷰> https://brunch.co.kr/@soganga4/9


<친구> https://brunch.co.kr/@soganga4/21


<폭주 기관차> https://brunch.co.kr/@soganga4/29


Chapter 1. 완벽주의 人의 휴식에는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 <폭주 기관차>


한 달 만에 만나는 것 같아요. 시험 기간, 어떠셨어요?

사실 지난 학기에 성적이 많이 안 좋았어. 그래서 더더욱 대면이 시작되고 걱정을 많이 했지. 과제도, 복습도 열심히 했어. 그런데, 내가 막판에 폭주 기관차처럼 탈선해버리고 말았어. 매 주 나름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공부했는데 막판에 미끄러진 거지. 내가 약간 고집이 있거든. A to Z, 그러니까 모든 개념을 샅샅이 훑고 전부 이해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무리해서 개념 공부를 다 해놓고 에너지 분배에 실패해서 시험 문제를 푸는 부분에서 놓아 버린 거지. 그래 서 점수를 보고 낙담을 많이 했지.


괴롭다. 그래서 선로를 끊어버렸다. 집착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는 대상을 가차 없이 지워 버린다. 나는 선로에서 벗어나 거친 땅에 사정없이 갈려 아픈 소리를 내다가 엎어진다. 선로를 이탈 한 기관차는 당장이라도 폐차될 것 같이 생겼다. 이미 승객을 태울 수도 없이 누추한 기관차는 화물 차가 되어 짐이나 나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짐도 나를 수 없다.
정다은, <폭주 기관차> 中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일수록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할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그녀의 글 <폭주 기관차> 속에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리 고 무작정 달리기만 할 줄 아는 기관차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기관차는 다시 선로로 돌아올 줄 아는 현명한 기관차다. 다시, 돌아오자.


열심히 하다가 막판에 미끄러지면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맞아. 근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준비해온 기간, 그리고 살아온 시간이 있으니 까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 근데 결과는 너무 정직하더라. 이 정직 함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쌓고 있어. 다음이 있잖아. 지금이 끝이 아니니까. 지금 포기 하는 순간 그게 끝이지. 기말시험까지 열심히 해야지.

그녀는 기차의 방향키를 다시 선로를 향해 잡았다. 고장 난 기차를 고치며 다시금 달릴 에너 지를 충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휴식조차 쉽지 않다.


<폭주 기관차>라는 글에서, “쉬는 것조차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유가 필요하다”라는 문 장이 있잖아요. 참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늘 쉬면서 마음 한구석에 부채감이 있었거든요.

뭔가 를 해야 한다는, 그런 정말 타당한 이유가 필요해. 나는 나를 너무 갈아 넣는 것 같아. 쉴 땐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안 돼서 그러는 것 같아. 시험 기간 중에 잠깐 쉬는 상황에서도 마음이 불편한 건 대부 분 느껴봤을 거야. 근데 우리는 그렇게 매일을 살고 있는 거잖아. 근데, 이건 우리 성향 같아. 본질적으로는 해결을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최대한 그걸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를 느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간을 간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간다거나 해서.


누군가 휴식은 일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남은 할 일이 ‘0’이 될 일이 없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그녀와 나 같이 휴식조차 합당한 사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겐 고통스러운 조언이다. 우리처럼 쉬는 것조차 일의 부담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쉬는 것조차 일 로 만들어야 하는 것 같다. 하루 할 일을 적는 노트에, 꼭 취해야 할 ‘휴식’을 기록하는 것이 다. 좋아하는 게임 다섯 개 레벨 깨기, 즐겨보는 예능 한 편 보기, 이런 식으로. 어리석은 일 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휴식에 대한 부채감을 지울 수 없는 사람들에겐 필요한 일이다.


Chapter 2. 인생에 늦어서 못 할 것은 키즈 모델뿐이다 - <인터뷰>

그녀는 올해 서강대학교 기계공학과에 편입학해 7학기에 재학 중이다. 그녀는 전적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전적 대학을 졸업하고 개발자로 취업해 1년 정도 직장을 다녔다. 그러다가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찾아 퇴사하고, 편입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일찍 출근을 해서 오늘 할 업무의 리스트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3년 뒤 의 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더라고요. 똑같은 업무와 일상에 지쳐 있는 제 모습을요. 저는 좀 더 제 삶에 도전을 주고 싶었어요. 이왕 하는 일, 사회에 도움 되는 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펙업을 위한 6개월 정도의 시간들을 계획하고 퇴사를 했죠. 하지만 20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지 뭘 계획해도 다 안되더라고요. 백수처럼 지내고 있던 저에게 하나뿐인 은사님은 편입 공부가 어떻 겠냐고 권유해주셨어요.
정다은, <인터뷰> 中


일하다가 다시 대학에 다니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 같아요. 다시 대학을 다니기로 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직장을 좀 다니면서 내가 생각보다 아주 어리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스물넷에 취업했는데, 나는 내 또래에 비해서 늦었다고 생각했거든. 지금 당장 취업해서 나의 길을 찾지 않으면 큰 일이 날 줄 알았어. 사실 보통 그 나이대 사람들은 졸업이 앞으로 다가오면 그런 생각을 하거 든. 나도 그런 취업 걱정에 떠밀려서 일을 시작했어. 근데 막상 회사에 오니까 내 또래가 없 더라. 내가 일하는 중에 신입으로 들어오셨는데, 서른두 살이셨어. 나한테 배우면서 일하는데, 나는 스물넷이잖아.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분이 엄청 열심히, 계속 배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작에 있어서는 나이가 중요 하지 않다는 걸 그때 실감했어. 주변에서 1년 정도는 여유롭게 준비해도 괜찮다고 했을 때, 그렇다고는 대답했지만,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속으로는 이해를 못 하 고 그냥 내 일을 시작했는데 나는 너무 어렸던 거야. 나보다 오랜 인생을 살아온 분들을 직장 에서 보면서 나는 생각보다 가능성이 크구나 하면서 시야가 좀 열렸던 것 같아.


인생에 늦어서 못 할 건 키즈모델이랑 아역배우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저도 아직 1학년이지만 벌써 졸업계획이랑 목표를 다 정해두면서 제 역량보다 더 무리하고 있었거든요. 대화하다 보 니 그런 조급함을 좀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생각해보면 스무 살 때부터 달렸거든. 나는 친구들이랑 안 놀러 다니고 도서관 가 서 공부하고, 창업 계획서 쓰고 그랬어. 그래도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달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물론 자기 분량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게 중요하겠지. 나도 저번 학기에 수강 신청을 하려던 양이 있었어. 그런데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2~3개를 늘렸는데, 그걸 소화하지 못해서 학점이 낮게 나왔어.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수강하고 있 거든. 그러다 보니까 친구들이랑 속도 면에서 확연히 비교되기는 해. 보통 편입생들은 2, 3년 안에 졸업하거든. 그렇지만 이게 딱 나의 분량이라고 생각해.


‘스스로 한계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위인전에 흔히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 통의 사람들에게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한계를 부여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 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의 삶을 지켜가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생 긴 여유로 나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본인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각자의 수용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 는 환경을 찾아 나가고 있다. 그녀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토대로 본인에게 맞는 템포를 찾았다.


그러면 인생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세요?

솔직히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이런 거에 큰 관심이 없어. 우리 집은 원래 가난했다가 갑자기 벼락 맞은 듯 부유해진 경우야. 그런데 가난했을 때랑 부유했을 때랑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아.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아. 그래서 퇴사를 할 수 있 었던 것 같아. 돈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비전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잘 쌓아온 지식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 꼭 그게 아니더라도 교육적으로 이바지하고 싶어.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그녀에겐 교육자의 꿈이 있다. 술술 인터뷰를 풀어나가는 말솜씨라면,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 달하는 일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이해하기 쉽게 글을 쓰는 그녀이기에 책을 쓰는 것도 꽤 잘 어울릴 듯하다. 이러한 그녀의 목표 때문에 폭주 기관차가 될 정도로 달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그녀에게 맞는 템포를 찾았으니 그 속에서 지식을 축적하는 일 만 남았다.


Chapter 3. 결국엔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 - <친구>

그녀가 성숙한 한 사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계기의 사람이 있다. 바로 그녀가 21살이 되 고 처음 입학한 대학교에서 만났던 언니다. 인간관계에 비관적이고 계산적으로 살아가던 그녀 는 ‘언니’가 주는 순수한 사랑으로 변화를 겪을 수 있었다.


스물한 살 때 순수한 사랑을 주는 친구분(언니)을 만나서 변화를 겪었다고 했잖아요. 그분이 어떻게 변화를 만들었을까요?

정말 그때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계산적으로 살았을 것 같아. 눈 치켜뜨고, 막 판단하고. 그분은 만나서 들어주기만 했어. 대화하는 모든 시간 동안 계속.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걸 아니까 계속 이야기하면서도 “언니, 듣기 싫죠? 집에 가고 싶으면 이야기하세 요.” 이런 식으로 말했어. (누군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이것이 진 짜 친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인 거지.


사랑은 변화를 낳고, 변화는 기적을 낳는다. 한 사람의 순수한 사랑은, 사람들의 웃는 얼굴 아 래 추악한 내면을 확신하던 그녀의 겨울을 사르르 녹였다. 그녀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 고,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야도 달라졌다. 더욱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길 꿈꾸게 되었고, 그녀에 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을 닮길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점점 차갑고 냉철한 사회가 되어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 위에서는 결국엔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 기적이다.


Epilogue. 울고 웃고 외로워하던 그날들로 맺은 결실

“안녕하세요. 제가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서 그런데, 밥 같이 먹어도 될까요?”
이기심이 만연한 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혼밥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불쌍해 보였습니다. 당연히 괜찮다고, 얼른 앉으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 은 제게 자신의 나이와 이름을 소개하더니, A과에서 조교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습니다. 이 사람과 친해지면, 저의 동기들과는 차별화된 인간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의 좋은 정보도 내가 제일 먼저 받을 수 있고, 다른 동기들에게 소개해줄 때 어깨가 으쓱 할 것 같았습 니다. 여러 가지 계산을 마친 저는 제 앞에서 조용히 수저를 들고 저를 쳐다보는 언니에게 두서없이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밥을 다 먹은 우리는 퇴식구 앞에서 물을 마시며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습니다. 당시 저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정다은 <친구> 中


<친구>에서 ‘언니’와의 첫 만남을 묘사한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그런 저의 치부 를 글로 잘 드러내지 못하겠던데, 언니는 과거의 자신을 고스란히 포장 없이 적으면서도 계산 적인 모습도 별로 밉지 않게 쓰셨더라고요. 심지어 되게 매력적으로 표현이 돼요. 언니 글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내 글의 매력은 ‘솔직함’인 것 같아. 나는 밥 먹고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글을 잘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아마추어인 게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내 욕심이 있지만, 욕심내 는 걸 포기했어. A4에는 ‘나’의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쉽길 바라며 썼어. 직설적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하게. 그래서 숨길 법한 이야기도 숨기지 않 는 거? 그런 솔직함이 내 글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


글은 사람을 고스란히 담는다.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녀의 단단함에 매 료되게 된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또다시 일어선 시간이 단단한 내면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또 다른 밑거름으로 만든다. ‘나’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글 에 담긴 그녀의 단단함은, 읽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 고통스러운 과거, 낙담했던 기억들, 남들이 보면 욕할 것 같은 치부, 이 모두 극복되어 현재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믿음이다. 설령 <폭주 기관차>처럼 해결되지 않은 그녀의 고민을 담은 글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단단 함으로 슬기롭게 해결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직설적인 문체, 이해하기 쉽게 쓰는 필력이 그녀의 단단함을 만나니 가장 편안한 글을 만든다. 그녀의 편안함은 울고 웃고 외로워하던 그날들이 맺은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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