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어렵사리 사회복지 쪽의 일을 하게는 되었지만, 단지 복지 정보를 안내하는 일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좀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어려움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싶지만 직장에서 나의 역할은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에서는 가톨릭 사회 운동의 성격인 '환대의 집'이 홈리스를 위한 임시 거주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도 '가톨릭 일꾼'이라는 소식지를 만드는 단체가 있지만 '환대의 집'을 개설할 정도로 홈리스 운동이 무르익지는 않았다.
홈리스가 겪는 인권과 사회적 문제는 몇 개의 작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고, 노숙인 시설은 모두 지자체에서 운영 중이다. 사회복지 시설로써 노숙인 시설은 사람들의 집과 공동체가 아닌 이용 시설이며 철저히 관리되고 입소를 위한 조건이 따라붙은 공간이다.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지자체의 예산을 사용하다보니 행정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코로나 시기에 정부의 방침대로 급식소가 문을 닫거나, 시설을 이용하려면 매주 코로나 검사를 해야했다. 또 입소 후에 몇 달의 시간이 흐르면 퇴소해야하는 일시 보호 시설이 많다. '노숙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설과 쪽방과 숙박시설을 전전하며 거주한다.
그렇다면 주택 지원을 바로 하면 되지 않겠냐고 누군가 물어볼 수도 있겠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공공임대주택 지원은 일정 수준의 자산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보증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임대주택은 영구임대 주택이나 전세임대주택 정도 밖에 없다. 영구임대는 경쟁이 높고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사람이거나 혹은 부양의무자가 없음이 인정된 사람들이나 가능하다. 또 전세임대는 민간주택을 알아서 구해야하는데 지원되는 보증금으로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숙박시설이나 쪽방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취약계층 주거상향 지원 사업이 있지만 거리 노숙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일정 시간 시설에서 거주한 사람만 그 자격이 주어진다. 얼마 전 텐트촌 사람들이 그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지자체의 공공 시설은 일정한 시스템을 갖추고 안전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규모가 커지고 공적인 영역에 있을 수록 기준과 조건이 엄격해질 수 밖에 없지만, 공동체적인 분위기와 사람의 얼굴을 한 집이 될 수는 없을까? 반대로 기준이나 조건이 붙지 않는 가톨릭 환대의 집은 주먹구구 운영되고 적자에 시달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운영이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봉사자가 선의와 책임을 거두는 순간 존립이 흔들릴 수도 있다.
어렵사리 취직한 직장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실천을 하는 가 돌아보게 된다. 지자체 산하의 복지 기관에 있든, 민간 단체에 있든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사실상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나의 안위와 안전을 우선하며 주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주 작은 일을 하더라고 나는 사랑을 이유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