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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한나 Mar 06. 2023

노숙 생활

볼품 없는 찬란한

1. 갈게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하다. 대충 샤워를 하고 떠났다.


"갈게."


아현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2. 작업

근처 피씨방으로 갔다. 창업 관련 작업과 기숙사 입주 준비 등등 여러 작업을 했다. 게임은 하지 않는다. 할 일들이 하나씩 정리되어가는 기분이 참 좋다. 게임은 하지 않는다. 모닥불 소리 같은 걸 들으며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훨씬 개운했다.


3. 농구

동아리 방이 열려 있었다. 거기 맡겨둔 트렁크에서 농구화를 꺼내 학교 야외 농구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좋았다. 옆 벤치 앉아 있다가 누군가 버리고 간 농구공으로 슛 몇 번 던졌다. 스텝도 밟아 보았다. 중국 유학생들이 와서 홀수로 농구를 하고 있길래 끼워달라고 했다. 한국말 잘하더라.


농구를 자주 하게 된다. 생각이 너무 많아 가만히 멍 때리는 것도 힘든데, 농구는 너무도 쉽게 생각을 지워준다. 승부에만 집중하게 되나 보다. 상대의 약점과 우리의 강점, 그것을 분석하고 이기는 데 몰두한다. 길을 걷다가 문득, 내가 없어져도 아무 상관 없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라는 자각이 인파와 함께 밀려온다.

하지만 농구란 소수, 최대 5명의 인원이 한 팀이 되는 스포츠다. 한 명이라도 없으면 치명적이다. 또 나는 키도 크므로 필수적인 존재. 소속감이란 건 존재감의 크기로 결정이 되는가 보다.

농구를 다섯 게임 연속으로 뛰었다. 중간에 한 명이 다쳐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자 드디어 끝났다. 근데 그러고도 나는 뭔가 부족해서 계속 혼자 공을 던졌다.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혼자 있으면 혼자인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서 몇몇 친구들과 전화를 했다. 친구들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5분도 채 안 되어 끊었다. 이번엔 내쪽에서 끊었다. 두 분은 내가 기숙사에 이미 입주해서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지... 다시 휴대폰을 뒤졌다. 더 이상 전화할 사람이 없다.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나는 벤치에 주저앉아 어플을 켰다.




4. 눈물

어제 밤 우리는 뜨거웠었다. 아현과의 첫 섹스였다. 그녀는 좋다며 자꾸 안기려했다. 나도 안아주었다. 쇄골에 닿는 신음이 심장까지 스미진 못하고 이슬로 맺혔다. 그녀의 가슴팍에 피처럼 떨어졌다. 관계가 끝나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녀가 울었다. 점점 울음 소리가 커졌다. 내가 처음 그녀를 사랑했던 때처럼 숨김없이 울었다. 나도 뒤이어 울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는 것들은 더 지독한 법이다. 이번엔 서로 안아주지 않았다. 각자 각자의 방식대로 울었다. 이젠 정말 끝-


"갈게"


오늘 아침, 입김처럼 번진 그 말이 마지막 인사였다.




5. 노숙

집이 없다. 잘 곳이 없다. 그렇게 수많은 연락을 해놓고도 막상 재워달라고 부탁할 친구가 없다. 지칠만큼 몸을 쓴 탓에 멀리 걸을 힘도 없고, 몸에서 괴팍한 냄새도 났다. 마침 내일 아침엔 수업도 있다. 개강 후 첫 수업이다. 스스로 참 볼품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그만뒀다. 추워서 손가락이 얼었다. 좀 따뜻한 곳이라도 가야지... 동아리 방은 어느 새 문이 잠겨있었다. 학교 학생회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따뜻했다. 라디에이터 열기에 손가락을 녹였다.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다시 켰다. 우연히 무서운 영상을 보게 되었다. 괜히 혼자있는 그 좁은 공간이 무서워졌다.

나와서 어딘가로 또 걸어걸어가다가 어느 건물 1층 로비에 들어가 앉은 채로 잠을 청했다.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데도 잠이 오지 않아 또 핸드폰을 켰다. 재워줄 낯선 사람이라도 찾으려했지만 아무도 없다. 거지꼴에 새벽 3시를 넘긴 모두 잠든 시간... 참 볼품 없는 날이다. 어떻게든 자야겠다는 생각에 소주를 한 병 사서 물처럼 마셨다. 그제야 정신이 좀 나가려했다. 다시 그곳에 앉아 잠들었다.


누워서 발 뻗고 잠드는 일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6시쯤 깨서 컵라면으로 속을 녹였다. 학교 건물이 열리는 8시쯤에 강의실로 들어가 또 엎드려 잤다.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 든다. 등줄기에는 식어버린 땀 결정들이 살가죽을 당긴다. 옷의 퀘퀘한 냄새가 보호막처럼 내 주변을 감싼다. 일부러 사람을 피해다닌다. 내가 피해다닌다. 나는 참 볼품 없는 놈- 이라 생각했다가도, 엘레베이터 벽면에 비친 내 모습이 아직은 사람처럼 보여서, 어쩌면 이런 청춘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 방긋 웃어보았다.


눈꺼풀이 쳐진 채 방긋 웃는 모습이 꽤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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