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수 없는 것도 있다

연필과 볼펜, 가죽 커버의 다이어리등. 내게는 소중한 보석들이다.

by 권소희


spring.jpg 올해는 봄을 기다리리라

3월이다. 봄이 시작됐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사계절이 분명했다면 3월은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온화한 날씨가 연일 이어졌다. 하지만 봄이라고 마음을 턱 놓기는 아직 이르다. 기온이 뚝 떨어졌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캘리포니아 날씨는 불분명하다. 꽃샘추위와는 다른 변덕이랄까. 겨울인 것 같으면서도 봄날 같고 봄이 왔는가 싶다가도 허겁지겁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캐시미어 스웨터를 꺼내야 한다. 계절을 분간하지 못하는 건 사시사철 초록빛을 잃지 않는 울타리 너머의 나뭇잎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해 거리에 세워진 길쭉한 나무에서 가을을 슬쩍 경험하긴 했었다. 나뭇잎이 화려한 붉은 빛을 내보이더니 결국은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뿐이었다. 여전히 굵은 고목나무기둥을 기어오르며 두 마리의 다람쥐가 청록색의 널찍한 이파리 속으로 숨는다. 겨울이 짧은 이곳이 그들에겐 천국이다.


올해는 봄을 반기기로 마음먹었다. 겨울을 좋아하는 내가 봄에게 마음을 쏟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은 햇빛을 차단했던 블라인더 각도를 세워 빛을 한가득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를 해야 한다. 청소, 심기가 불편해진다. 봄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가 고작 청소 때문이라니. 고작이 아니라 사실 내겐 큰일이다.


지난겨울, 딸이 불쑥 책 한 권을 건넸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책을 사온 성의를 생각해서 끝까지 읽긴 했다. 읽고 났더니 오히려 딸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왜 책대로 따라서 정리를 하지 않느냐고. 딴에는 엄마를 생각해서 사온 것이니 하는 수 없이 책에서 시키는 대로 옷장에서 옷을 죄다 꺼냈다. 어깨심이 심하게 들어간 디스코 풍의 원피스와 살이 빠지면 입으려고 했던 A라인 스커트를 제외하고는 결국은 몽땅 챙겨서 다시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다음은 부엌. 찬장을 열어보니 버릴 것 천지다. 그걸 정리하려니 머리가 아파왔다. 이사라도 가면 모를까. 도무지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spring2.jpg 정리가 되지 않는 내 책상

사실 정리가 안 되는 건 유행 지난 옷이나 이 빠진 접시 따위가 아니다. 연필과 볼펜, 형형색색의 종이류, 가죽커버로 된 것부터 내 이름이 한자로 새겨진 검은 색 수첩까지. 책상 위에는 볼펜과 가위, 파지를 반으로 자를 메모지들이 너저분하게 차지하고 있다.


책에는 정리를 하려면 무조건 몽땅 버리라고 적혀있었다. 안 될 말이다. 하긴 그 책에 보석을 버리라는 말은 쓰여 있지 않았다. 내게는 수첩 따위의 문구류들이 보석이다.

청소만 없다면 봄은 꽤 괜찮은 계절이다. 오늘같이 햇살이 따뜻한 날은 묵은 먼지가 유난히 거슬린다. 팔을 걷어붙이고 유리창이라도 닦고 싶다. 설사 내일 날씨가 변덕을 부릴지라도 오늘은 이 따스한 햇살이 살갑다. 내 마음에 벌써 봄이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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