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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음악포기인 모임, '소리잇' (2)

by 소흐

음악은 마치 짝사랑 같았다.

내 마음을 알까 두렵기도 하고, 말하지 않고도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7월, 소리잇의 첫 공연.

매년 반복되는 새해 다짐이 이번에도 해가 중반을 훌쩍 넘겨서야 현실이 되었다.

멤버 모집이 늦어졌으니, 더 미룰 것도 없이 바로 공연을 하기로 했다.

공연은 딱히 대단하지 않은 '선포식' 정도로, 우리끼리 소박하게 시작하는 자리라고 알렸다.

사실 만반의 준비까지 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했다.

완벽함보다 지속과 성장이 더 중요한 목표라는 핑계로, 조금은 느슨하게 달렸다.

정말 조용한 공연일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건물주님까지 오셨으니, 주인장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내가 설 무대가 괜히 더 작아진 기분...

사람들로 빼곡한 공간에서, 나는 벽지에 붙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구석에 스며들고 싶었다.

이미 많은 무대를 경험했는데도, 그 무대를 망칠 사람은 늘 나뿐이라는 생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대 위 실수는 필름 위에 긁힌 자국처럼, 내 기억에 긁힌 모습으로 그 장면만이 오랫동안 상영된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린다.

매번 12월 공연을 위해 힘을 쏟다 보면, 연초에는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막바지에 부랴부랴 준비하는 일이 반복됐다.

달력이 12에서 1로 넘어가면, 내 의지와 체력도 12에서 1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매달' 공연을 열기로 했다.


누구도 룰을 안 지켜도, 내가 지키면 언젠가 흐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엔 토요일, 일요일을 번갈아 잡아봤지만,

일요일까지 진탕 술을 마시고도 출근할 기력이 남아있는 나이는 이미 20년 전에 끝나버렸다.

나도 그 중년의 체력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여서, 하루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로 자리를 잡아갔다.


한 달에 한 번 공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습하지 않은 날 만큼 변명도 늘었고, 마지막주 토요일을 향해 달력의 숫자들이 매일 1씩 더해지는 게 왠지 내 불안지수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공연의 기준'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내 실력은 점점 그곳에서 멀어지는 느낌.

계속 내 무대를 망치다 보니, 드디어 인정하게 됐다.

이게 내 실력인 거다.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 모였지만, 궁극의 목표는 고퀄의 무대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응급실

7, 8월 공연도 무사히 끝났고, 이제는 큰 변수 없이 가겠지 싶었다.

하지만 9월 공연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러운 극심한 복통에 밤길을 달려 응급실로 향했다.

건강에 대한 별 걱정이 없던 나는, 단순한 급성질환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CT 결과, 진단은 장염.


(+)

그런데 의사가 장염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다. 복부에 다른 이상이 있으니, 병원을 다시 찾으라는 말이었다.


그날의 응급실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다.

멀리서는 들리지 않는 의사의 입이, 대기하던 사람들 앞에서 들썩였다.

응급실에 도착한 뒤, 내내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이들의 표정이, 의사의 말에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이내 몸 안에서 무언가 터져버린 것처럼, 절규와 눈물을 토해내었다.

입을 틀어막아도 그것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의사의 우려가 담긴 말까지 듣고 나서도 별 감흥 없이, 치료를 받으면 된다는 속 편한 생각이, 그들의 울음과 절규를 보자 모두 전소해 버렸다.

나는 응급실 침상에 누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하루가 누군가의 마지막 밤에 잠시 얹혀졌다.

나에겐 잠깐의 해프닝이라고 여겼던 공간 속에, 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소리를 들었다.

허무하고 슬픈 감정도 밀려왔지만, 나는 이내, 누군가의 비극을 지나치고, 내일 있을 공연에 대한 걱정을 앞서 생각했다.

나는 좀 더 생각을 죽이고 스스로 쥐어준 내 하루의 일들을 해내자고 마음먹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미안하게도 나의 삶을 좀 더 충실하게 살고자 다짐하게 했다.




완벽주의(9월 공연)

아침이 되니 몸이 500kg쯤 되는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운전이라니, 모두의 안전을 위해 결국 살롱에 가는 건 포기했다.

유튜브 생중계로 공연을 지켜봤다.

내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내 역할을 맡기지 않았기에, 나의 부재가 훤히 드러났다. 반성하게 됐다.


책임을 나누는 게 옳다는 걸 알면서도, 완벽주의와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 막혀 실행되지 못했다.

카메라 너머로 보인 익숙한 얼굴들에서 당혹감이 보였다.

그 표정에서 나는 내 쓸모없는 완벽주의가 남겨버린 그림자를 보았다.


평생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어려웠다.

아파 죽겠는 상황에서도 왜 남에게 손을 빌리지 않느냐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핀잔을 많이 들었다.

멤버들이 손을 보태주었을 때는 내 부탁이 아니라,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는 내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망했다(10월 공연)

외래진료를 몇 차례 다녀오며 내 안에 오래 묵은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착실히 병원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10월은 자연스레 내 몸에 시간을 쏟는 달이 됐다. (그동안은 병원과 연이 없었지만, 2차 병원에서 목숨을 운운하며 겁을 주었다.)

병원을 포함한 여러 외부일정들이 있기도 했고,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멤버들 역시 조금은 여유가 필요해 보였다.

나를 포함해 다들 조금 지친 듯 보여서 10월 공연을 아예 '망했데이'로 정했다.


망했데이답게, 공연 순서도 제비 뽑기로 정했다.

심지어 손님으로 온 분의 이름도 종이에 적어 넣었다.

무대를 마친 사람이 직접 다음 주자를 뽑았다.

관객 한 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유튜브 노래방 채널로 선곡을 하고 한 곡 찐하게 부르고 가셨다.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무대가 즐거웠다. 가벼운 마음이 오히려 노래를 편안하게 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망했데이는 사선으로 쏟아지는 비 같았다. 비에 젖을까 전전긍긍, 좁은 우산 속에서 종종걸음을 걷는 것보다 차라리 우산도 내려놓은 채, 시원하게 맞아버리고 피하지 않는 게 더 속 편하다.


(+)11월 공연

수술은 금세 끝났고 일주일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른바, '고음불가'인데, 11월 초에 배에 구멍이 날 예정이니, 고음 있는 곡을 10월에 미리 부르자 했었다. 그렇게 농담했는데,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

11월 공연에서도 고음 있는 곡을 불렀던 것 같다.

수술을 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소화했다.

의사는 "젊어서 회복이 빠르다"며 하루 일찍 퇴원시켰다.

수술을 받은 주체가 나였던가? 싶을 정도로 아득하다. 벌써 다른 사람의 일이 되어있었다.

아플 때도, 의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아팠던 모든 날에 의지가 꺾였던 것 같다.

지나가고 나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희미해진다.




작심삼년(12월 공연)

주축 멤버들은 도토리-밤토리-소리잇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그래서(중간에 합류한 멤버들에겐 미안하지만) 연말 공연의 이름을 '작심삼년-마음먹으면 삼 년은 한다'로 정했다.

눈이 계속 쏟아지는 눈밭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이내 새로운 눈으로 뒤덮인다.

어느 방향으로 내딛든, 항상 새로운 발자국이었다. 그동안 무대를 계속해왔지만, 그럼에도 또 새로웠고 설렜다.


이번 공연에는 별것 아니지만, 작은 준비에도 힘을 많이 줬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지 모를, 혹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미세한 준비도, 그날은 내게 축제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뷔페도 준비하고, 라이브를 위한 카메라도 여러 대 준비했다.

디지털믹서의 성능을 이 공연 준비과정에서 처음 확인했다.

살롱의 주인장은 새카만 벽으로 2년 전 1층의 낭만을 재현하기 위해 애썼다.

무대를 준비를 하는 동안의 소란과 분주함마저 오래 기억될 풍경이 되어갔다.


2024년 마지막 위기.

내 완벽주의를 뿌리 뽑으려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공연 일주일 전, 독감에 걸려버렸다.

회사에서 독감을 데리고 온 어머니와 완벽하게 격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독감이 지독한 것인지, 수술 이후로 면역력이 박살 난 건지, 공연 전주에 합주를 하며 으슬으슬 아파오는 느낌을 애써 외면했다.

관객도 하나 둘, 독감으로 참석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 공연날 격리 기간이 걸린 건, 객원보컬 한 명뿐이었다.


무대에 오를 때, 밑밥을 한가득 깔았다.
숨도 간신히 쉬는 상태에서 노래 부르기는 너무 어려웠다.

나는 평생 독감과 인연이 없었고, 감기도 까마득한 옛날에 한 번 앓았던 게 마지막이라고 자부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건강도 마음껏 자랑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조금은, 서글퍼졌다.

숨이 반토막난 이의 밤헤엄




오프닝과 엔딩에는 중딩보컬과 중딩댄서를 세웠다. 우리 모임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순서였다.

좀 더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잘 스며든 공연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공연 이후,

젊음이 넘쳐 괴로웠던 한 사춘기 소녀는, 몇 달간 얼음보다 차가웠던 어머니와 관계를 따뜻하게 데우고 귀가했다.

어떤 소녀는 자신의 불안함이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자신 있게 노래했다.

누군가는 밤새 노래를 부르다 귀가했고,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훤히 드러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서로 다른 감상, 다른 경험으로 이 시간을 보냈다.

2024년도, 어설프지만 예쁘게 잘 접어 반듯한 상자에 담아낸 것 같아 미련 없이 잘 묻어둘 수 있었다.


우리의 이듬해는 공인된 단체로 거듭나기로 약속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단체 가입자 개인정보를 받았다. 감사 인사도 전했다.

(아직 단체 등록은 미뤄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서류 뗄 일로 관공서에 가는 게 가장 귀찮다.)

올해 새로운 멤버들도 합류했다.

단톡방에 아직 남아있지만, 활동하지 않는 멤버들도 있다.

아직 위기라고 할 것은 없지만, 즐거운 무대를 만들기 위해 창의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속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내 발자국이 새겨질 깨끗한 눈밭이 기다리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

음악은 마치 짝사랑 같았다.

내 마음을 알까 두렵기도 하고 말하지 않고도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만든 경계가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여전히 서툴고 자주 흔들리며, 때로는 무대 뒤에서 망설인다.

짝사랑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아니라, 지지 않는 마음으로 오래 바라봐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음악을 바라봤다.

사랑이란 게 항상 화려한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소소하고 심지어 사소한 나의 소음들이 누군가에게 노래가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망설일 테고, 자주 부끄러워하겠지만
짝사랑하는 음악에게 잠시 눈길을 받았던 것처럼, 언젠가 동등하게 마주하고 대화할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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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최근일이라서 정리가 안 되는 것 같다는 변명 해봅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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