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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음악포기인 모임, '소리잇' (1)

by 소흐

정체기

매번 기획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무대를 돕느라, 내 무대는 늘 뒷전이었다.

23년 12월,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내 노래를 공개하던 날, 벅찬 환희가 밀려왔다. 나의 음악을 계속 만들고 싶었다.

토리는 24년 3월까지, 새로운 사람들의 합류로 한껏 커지는 듯했지만 제약 없는 운영이 오히려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점점 조용해졌다.

그래서 새로운 방을 하나 만들었다. 도토리도 밤토리도 참여할 수 있는 '토리방'. 나갈 타이밍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나지막이 문을 하나 더 열어두는 마음이었다.

공연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왔던 몇몇은 새로운 방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도전을 또 이어나가는 듯 했으나, 나는 간과했다. 새로운 모임은 또 다른 새로운 일을 도모할 사람들과 시작돼야 한다는 것을.

모두의 우선순위가 같을 순 없었다.

장거리라는 현실적인 제약, 그리고 나에겐 가장 첫 번째인 '음악'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다른 것들보다 한참 뒤에 있는, 잠시나마의 여유 이상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나는 앞에서 이들을 끌고 왔지만, 이제는 뒤에서 밀어주고 싶었다.

내가 만든 관성에, 나도 등 떠밀려 움직이는 그런 역할이길 바랐다.


류작, 형님

밤토리 공연 몇 주 전, 살롱에서 합주를 마치고 기타 친구와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살롱 주인장의 드라마 작가 동기였던, 그리고 음악을 한다던 친구가 새벽 4시의 살롱을 방문했다.

새벽이 아니고서는 30분 만에 도착할 수 없는 거리인, 서울의 한 지역에서 온 그는, 오래된 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10년 만에 기타를 꺼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무대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미사리 어느 카페의 한 공간을 노래로 채우던, 레퍼토리만 300곡쯤 되는 연주자.

그의 중년을 상징하는 히끗한 흰머리의 외모는, 80~90년대 신촌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의 첫인상은 대체로 평범하다 하고 이튿날의 인상은 매력적이라 한다. 그리고 1년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진다는 익숙해지면서 주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통계가 있다.

그에게서 내가 꿈꾸는 모임의 미래를 보았다. 첫인상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입을 다물었다.

2일 차의 내가 되려고 애썼다. 그에게 남기고 싶은 건, 적당한 거리와 미지의 매력...


우리의 첫 만남.

역시나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살롱의 주인장은, 이번에도 자신의 머릿속에 펼쳐진, 그림이 될 장면을 실현하기 위해, 그에게 밤토리 공연날 무대를 서 달라고 졸라댔다.

정규 무대는 어렵겠지만, 그의 수백 개의 레퍼토리는 공연의 밤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프로의 문턱은 넘지 못하고, 아마추어에 머물러 있는 나는, 이 모임을, 전문성을 가진 모임으로 이끌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토리에 합류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정이라는 것은 매번 현실에 벽을 세운다. 누구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엔 반기를 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요즘 많은 남편들이 그렇듯, 그도, N잡과 육아를 병행한다. 그 와중에 슬금슬금 살롱으로 빠져나와 젊은 날의 무대를 다시 그려본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음악은 '꿈'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음악을 반대하는 모든 뮤지션들의 가족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처럼 과거에, 음악이라는 삶의 일부를 묻어두고 언젠가 다른 이의 삶인 듯, 잠시나마 꺼내보고 다시 덮어버리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들이 포기했던 것은 '음악으로 벌어먹고 사는 일'이지 '음악'이 아니지 않은가...


단체를 만들자.

정치인이었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네가 하는 일이면 나도 갚을 빚이 있다. 언제든 돕겠다." 했던 친구였다.

시민운동, 조직운영. 그는 이런 것들에 이미 익숙한 사람이다. 나에겐 이런 실무에 대해 도와줄 수 있는 드문 인맥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실력이나 경험을 빌려 쓰고 싶었다. 그동안은 내가 가르치는 역할이 많았지만, 이제는 나를 가르쳐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모임이 아니었다.

한 계절 머물다 흩어지는 모임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고, 사람도 쌓이고, 의미도 쌓이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언젠가 재단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생겼다.

재단이 되려면, 협동조합이든 비영리든, 형태는 무언가 있어야 했다. 그 출발점에 류작형님이 함께 했으면 싶었다.


단체의 목적과 목표.

사람을 모으려면, 목적과 목표가 분명해야 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단체인가.'

나의 정체성 중에 하나는, '싱글' 내 노래를 들어주는 대상도, 20대 30대 싱글이길 바랐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족 단위 공연을 몇 번 해보며,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특히 류작 형님을 보며, 그 마음이 확실해졌다.

음악을 하다 내려놓고, 육아와 생계에 묶여 있던 음악이, 어느 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음악은 명함을 쥐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건강한 방어기제로써 작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정됐다.


소리잇

꿈을 좇는 사람, 꿈을 보류하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걸음을 떼는 단체가 되길 바란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목표가 되고 선생이 되기도, 학생이 되기도 하는 그런 곳.

어른들과, 아이들과,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무대.

가장 중요한 건, 서로의 삶을 존중하면서 음악을 놓지 않는 일.

그래서 아이들도 함께 하길 바랐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음악을 하려면, 반려자의 이해 없이는 어렵다.

그리고 그 이해를 가장 빠르게 끌어내는 방법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살롱으로 오면, 직접 반려자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이 음악 활동이 가족 전체에게 주는 이득을 그들은 경험할 수 있다.


이후 나는 류작형님을 필두로 사람들을 다시 모았다. '소리를 잇다-소리잇'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모임에는 살롱의 주인장, 구. 정치인 친구, 그리고 내 기타리스트 친구가 함께했다.

토리에서는 음악을 지속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모였고, 이미 프로로 활동하고 있던 한 형님도 합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래 함께하진 못했다.


우리 중 프로는 기타 친구와 류작형님이 있다. 나머지 멤버들은 아마추어이거나, 깊은 취미의 경계선 위에 있다.

각자의 목표는 달랐지만, 공통의 목표가 하나 있었다. '성장'

우리는 언젠가 재단이 될지 모를, 조금 더 먼 목적지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아니하여 종일 누워있다가 이제 좀 나아져서 글 올립니다. 오늘은 좀 짧네요. 남은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미룹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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