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없는 삶
나는 미혼이다. 비혼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결혼을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너 아니면 앞으로의 내 인생이 없겠다" 싶거나, "혼자 늙어가는 건 쓸쓸하군" 싶은 날이 온다면, 누군가와 함께 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굳이 '결혼'이라는 형식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지붕 두 가족이랄까.
설령 결혼을 한다 해도, 나는 부부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배려마저도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 금방 이혼당하지 싶다.
내 주변에도 결혼한 친구가 없다.
연락이 끊긴 옛 친구들 중에는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이 없다.
사회생활하며 맺은 인연들에게도 아직까진 결혼 소식이 없다.
결혼을 한 사람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세상은 나와는 무관했다.
나에게 '결혼'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생활.
그냥 다른 종족의 삶처럼 느껴졌고, 아주 다른 세계관의 영화처럼 보였다.
관계는 복잡하고, 사람은 어렵고, 같이 산다는 건 훨씬 더 어려웠다.(이 정도 설명이면 내가 얼마나 결혼이랑 옷깃도 안 스치는 인간인지 아시겠지들…)
영어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부부와 육아의 세계....
그곳에 나 같은 미혼은 거의 없었다.
정말 딱 하나, 그래, 생각해 보니 한 명 있었다.
대부분 결혼을 했거나, 한 번쯤은 해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가 있었다.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내도 없는 인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엄마이고 아내인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는 꽤 생경한 풍경이었다.
"소흐님 부럽네요", "소흐님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처음엔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가 그렇게 부러우면 이혼하면 되지 왜?' 어떻게든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경험이 없는 너는 복인 줄 알라는 ‘시기’인 건가 뻐기는 건가, 베베 꼬여서 별 생각을 다 했는데, 오죽 힘들었으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언젠가 들었다.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책 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그 시대 아버지였고, 엄마는 집 밖에 나가기 어려웠다.
어쩌다 취직을 하게 되더라도 석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아버지 사무실 직원들의 밥을 챙겨주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밥, 집안일 아니면 책이었다.
어린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 시절 엄마의 이미지는, 늘 무력한 책벌레 같았다.
늘 뭔가를 삼키고 살아가는 사람.
책이 도피처였을까. 생존 전략이었을까.
엄마의 친구들도 크게 다른 삶을 살진 않았다.
먼 타지로 시집온 엄마는, 고향친구들을 뒤로하고 같은 아파트,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가진 엄마들과 어울렸다.
모두가 서로를 '누구 엄마'라고 불렀다.
그 시절의 엄마들은, 이름보다 엄마라는 정체성이 앞서는 인생을 살았다.
엄마들은 영원히 엄마 같은 인생을 사는 줄 알았다.
나는 고정관념이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그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더 옳은 것에 집착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강한 고정관념을 만든 셈...
결혼도 그중 하나였다. 결혼은, 여러 목적으로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시스템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결혼에 비관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기질에 가깝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어느 날, 나보다 어린 '엄마'들이 나타났다.
영어공부를 하며 만난 사람들 중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엄마들이 있었다.
줌으로 그들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다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 보니까, 어린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외모가 어려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니라,
'엄마'라는 신분이 나의 고정관념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처음엔 어색했다.
우리 엄마도 서른 중반에 이미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인생이 낯설고, 어른이 되는 게 버거웠는지, 그들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마다 나이를 먹어가지만,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실감하며 살아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 또래 엄마들을 보며, 점점 내 나이는, 젊지만 어리지는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내 눈에) 어린 엄마들의 배움은 끝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책 한 권, 공책 한 권을 제대로 끝까지 읽거나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관찰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목표로 하길래,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를 할까?
시간이 지나며 보이기 시작한 건, 대부분 자녀가 10살 이상 되는 시점이라는 거였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많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기 앞가림을 조금씩 하게 될 즈음에서야 비로소, 엄마들이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구나.
그게 10년이라니.
나에게는 꽤 암울한 사실이었고, 그들에게는 입을 다물게 되는 존경의 이유였다.
그들과 함께하며 처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예전의 나는 조금만 힘들어도, 안 되면 바로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노력을 한다기보다,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들과 함께 하며, '노력'이란 단어가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만이 노력이 아니었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들을 견디는 것.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하는 모든 과정이 노력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외로워서 결혼했든, 사회풍토가 그러해서 결혼을 했든, 뜨겁게 사랑했든 처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혼은 함께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인내심을 갈아 넣는 과정이라는 걸 안다.
성격 차이를 견디고,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는 관계. 스스로가 부처가 되어야 견딜 수 있는, 그 소소한 불행 속의 행복을 선택한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기타 수업을 잘 따라와 주었다.
물론 늘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어디서든 다양한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중 한 명은 자존심이 높았고, 울면서 연습을 이어가는 날도 있었다.
각자 한 곡씩을 선택했다.
처음엔 진심으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일, 정말 매일, 그 바쁜와중에도 사람들은 수 시간씩 연습을 이어나갔다.
이쯤 되니, 육아와 집안일을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기타가 아니라 쌀통의 쌀알을 세는 일이었더라도 분명 해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동강 난 쌀알은 두 조각을 합쳐야만 하나냐고 분명 물어왔을 것 같다.
반복은 발자국을 남기고, 그 발자국은 어느새 길이 되었다. 나도 누군가의 발자국에 발을 얹으며 배웠다. 아마 앞으로는, 누군가 이들을 보며 이 길에 발을 내딛게 되겠지.
가르친다는 건, 선생이 학생에게 주는 일방적 소통이 아니었다.
호기심, 눈빛, 기운. 그 모든 게 나를 다시 공부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다.
배움은 물감 같아서, 서로를 닿게 하면 전혀 다른 색이 났다. 각각의 색이 다 달랐다.
그들은 전업주부이기도 했고, 워킹맘이기도 했고,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쌍둥이, 아들 둘.. 극악 난이도의 육아를 해내면서도 기타를 배우고, 연습을 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었다.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엄마라는 이름 바깥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시도였다.
그들은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아줌마'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젊은 여성들 같았기도 했고, 이제 막 입을 뗀 아이 같기도, 백발의 도사 같기도 했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될 뿐, 늙는다는 감각은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 무렵, 또 다른 '엄마'가 있었다.
어쩌면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었던 사람.
수년의 고민 끝, 아이를 영영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이전에, 배우자 없이 아이를 만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어렵게 얻은 아이는 건장한 장군감 여중생이 되었다)
그는 신해철 추모 공연 때, 우리 팀을 섭외했던 기획자였다.
내 번호를 누구보다 먼저 땄다고 자랑했던 기억은 있는데, 모든 이와 모든 상황에 '낯섦 알레르기'를 겪는 와중에 내 번호를 따갔다.
그래서 처음 전화가 왔을 때, 누군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아마, 나에게 접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본인이 더 베테랑이면서 간판디자인 추세가 어떤지, 어떤 방법으로 시공을 하는지 물어왔다.
그 후, 어느 정도 내가 파악이 됐는지, 유시민을 미끼로 더욱 접근해 왔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인 '신해철'의 팬들로 구성된 트리뷰트 밴드의 식대와 연습실을 자비로 책임졌다.
예산이 부족했던 '신해철거리'행사에도 자신의 사비를 털어 행사를 완성했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 결국 일을 냈다.
수천 권의 책으로 꾸며진 벽과 하얀 드럼이 놓인 작은 무대. 누구나 지나다가 들러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길 바라며, 살롱을 만들었다.
나는 그 공간이 단순히 몇몇 사람들을 위한 아지트나 휴식처로만 쓰이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했고, 허락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연말에 공연을 할 거예요." 모두가 두려워했다.
사람들 앞에 서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신이 보여지는 것을 낯설어하고 두려워했다.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밖에 없을 거예요."
잘하고 못하고에 대한 의심은 내 몫이었다. 그들은 그냥, 믿고 움직였다.
나는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현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연습하고, 부딪히고, 성장하는 그 하루하루를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현재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기록은, 나의 자랑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인생 한 귀퉁이에 내가 작게 스며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웬 욕심을 내려놓은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적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됐다.
이제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이를 보지 않게 됐다.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변화하고자 노력하며, 배움 앞에서 기꺼이 겸손해지는 그 얼굴들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이었다.
(추가)
어릴 적, 형제들에게 학교를 양보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갔던 엄마가,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어릴 땐, 학교 호구조사에 부모님의 학력을 적어내야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항상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난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까지 엄마가 고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새로 입학한 중학교에는 엄마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엄마와 또래이거나, 나이가 더 많은 분들.
매일 뭘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내가 생활하는 1층 거실까지 깔깔거리는 웃음이 전해진다.
2주에 한 번 학교에 가는데, 엄마는 그 2주 내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항상, "공부해야 되는데..."라며 미스터트롯을 틀어놓는 건, 만학중학생들 국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