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 낭만을 다 때려 넣은 듯한 이 살롱에서의 첫 공연은,
음악의 신이 내게 준 노래, '밤헤엄'이라는 선물처럼, 다시 재현하고 싶어도 꾸며낼 수 없는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살롱의 공간이 수천 권의 책들로 꾸며졌다. 반사되는 소리가 없어, 노랫소리가 예쁘게 났다.
구슬 조명과 핀 조명이, 밤하늘을 칠해놓은 천장과 벽에 달려 별처럼 반짝였다.
무대 위, 하얀 드럼이 조명을 받고 주인공인듯 자태를 뽐내고 있고, 빈 책장 속 각양각색의 머그컵들이, 어린아이들처럼 귀엽게 옹기종기 모여있다.
출입문 너머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 주었다. 사람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공기 중의 먼지가, 공간을 데우기 위해 타오르던 난로의 불길 속에 부딪히며 이따금 탁탁 소리를 냈다.
겨울의 유리창에 동글동글 맺힌 서리로, 이 따뜻함이, 사람들에게서 온 온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제든 마냥 쉬어가시라."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주인장의 배려는 곳곳에 묻어났다. 공간이 사람을 닮았다.
리허설과 공연당일, 우리는 서울, 목포, 동해 등 제각기 먼 곳에서 성남의 살롱으로 모였다.
서로 알게 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날이었다.
어릴 적, 얼굴도 모르고 몇 달을 주고받던 펜팔친구를 만나는 것 같이 설렜다.
설레기도 했지만, 매주, 줌으로 만난 익숙한 얼굴들이었기에 아침에 커피 한 잔을 함께 나눴던 이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움도 더해졌다.
내가 언제 목포에, 동해에 지인을 둘 수 있을까.
이 작은 만남이, 먼 도시들을 이어줬다.
좁고도 넓은 네트워크 세상에 참 고마웠다.
우리 학생 중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었다.
이 공연의 완성된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는데, 나에게는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항상 배우지 않은 걸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그림'이었다.
하나의 선으로, 끊어지지 않는 기타 이미지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베테랑. 기타를 그리는 과정을 담은 1분짜리 영상을 보내주었다. 그 이미지를, 영상의 시작에 넣었다.
공연장에 카메라 두 대를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개인스마트폰으로 촬영을 부탁했다.
리허설부터 기타 친구의 명품귀를 빌려, 각각의 공연자에게 최적화된 소리를 아날로그 믹서로 설정했다.
(이때 디지털믹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가장 최근 공연에, 구입해 버렸다. 이 짓을 하면 할수록 장비에 눈 돌아간다.. 그치만 너모좋다ㅠㅠ)
혼자서 뛰며 기며 음향을 세팅했다. 첫 무대에서 아내의 연주에 노래를 불러주실 형님이 안쓰럽게 바라봐주셨다. 그것만으로도 크게 위로를 받았다. ㅎㅎ
힘들게,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아마도 내 안에 조용히 숨어있던 완벽주의..라는 오만을 사람들에게 보인, 첫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완벽함의 목적은 기술의 정교함이 아니라, 누군가가 편하게 노래할 수 있도록, 모두가 이 순간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그 순간의 완벽함'을 함께 공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작은 살롱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리끼리의 작은 공연'이니, 부담 가질 것 없이, 편하게 해도 된다고 당부해 왔다.
그래서 공연직전까지도 하하 호호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도 며칠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살롱 주인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팔도 너머까지 닿는 인맥이, 우리의 첫 무대를 '동네'공연에서 '동'공연 수준으로 키우고 있었다.
나의 기타리스트 친구, 살롱의 주인장, 그의 딸과 단골 미용실 원장님, 함께 공부하던 친구... 그리고 그 외에도 대체 어디서들 나타났는지,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았다.
단골 미용실 원장님은 내게 꽃다발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쁨이 더 컸다. 잘 말려서 아직도 보관 중이다.
이렇게까지 크게 벌릴 일은 아니었는데. 작은 모임하나가 공연을 만들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흐름상 멘트가 필요했는데, 준비하지 않았다... 몰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선 듯, 우물거리다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게 멘트를 준비한 척 후딱 쏟아내었다. 더 어버버거릴까 무서웠다. 얼른 무대 위로 올라갔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따로 있었기에,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오프닝무대를 자처했다.(실수였다.. 왕창 실수해 버렸다.)
아내가 연주하고 남편이 부르는 노래, 화려한 싱글의 다채로운 곡들, 레몬과즙 같은 40대가 부르는 사랑노래, 무대 순서마저도 완벽했던 이날의 공연은 2년을 훌쩍 넘기고서도 여전히 나의 뇌내극장에서 자주 상영되고 있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쿨한 척하는 따뜻한 사랑노래에 따뜻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드라마' 드라마 같은 사랑을 꿈꾸다 현실로 돌아오는 섬세한 노래, 정말 사랑스러웠던 무대
'산책' 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곡이라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땐 사뿐사뿐 들리던 노래가, 지금은 아버지의 거칠어진 손등과 터벅터벅 걷는 걸음이 떠오른다. 담담히 부르는 이 노래를 모두가 울컥한 듯, 숨을 삼키고 말없이 감상했다.
이때 처음 안 곡들이다. 내가 요즘 노래를 듣고 사는 건지... 더는 진보하지 않는 내 플레이리스트의 멈춘 바퀴를 굴리게 하는, 신선한 선곡이었다.
모두에게 부르고 싶은 곡을 스스로 정하도록 했었다.
악보를 구해주기도 하고, 그려주기도 하면서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산을 깎는 심정으로 곡연습에 임했다.
어쩌면 의미 없어 보였던 이 공연은, (주인장의 말을 빌려,) '꿈을 잃지 않은 어른들과 꿈을 꾸기 시작한 아이들'이 함께 하는 공연의, 막 피어난 불꽃같은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귀여운 초딩의 급조된 공연이, 그 불꽃을 키워주었다.
완전 엉터리에 귀여워죽겠다. 지금은 중딩이 된 아이들의 이불킥 30년 치, 이 영상을 보면 창피해하겠지만, 내 눈에는 용기 낸 아이들이 너무 멋졌다. 나는 이 나이에 뭘 했더라.... 아, 어른들 앞에서 춤췄지..
가장 어렵다는 '시작'을 우리는 함께 겪었다. 지나고 보니, 이때가 시작이었구나 싶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랬다. '멈추지 않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정정하고 싶다. 나 혼자서는 이만큼도 온 적이 없었다.
서로 키재던 도토리들은, 밤토리로 진화했다. 협업하고, 무대를 만들고, 또 다른 기록을 준비하며 다음 해에도 공연을 이어나갔다.
(추가)
영상은 열심히 찍어놓고 몇 달 뒤에나 영상을 완성했다. 지금 보니 색감도 다 다르고 전환이 빨라서 정신이 없다는 게 좀 아쉽다.
이땐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ㅎㅎ 완벽주의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성장하며 더욱 느낀다.. (근데 잘 안 된다. 알다시피..)
** 다시 한 번, 영상 공개를 허락해주신 분들께 고맙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