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사주에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묘하게 들어맞는 부분이 재밌어서 역시나 겉만 살짝 핥아본 적이 있다.
가는 김에 스님도 뵙고 사주도 보러 가고 겸사겸사 3시간, 왕복 여섯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다녀왔다.
여섯 시간이면 우리 집 고양이 놀아주기 삼 주 치나 되는 시간인데...
그 무렵 나는 영어 공부를 막 시작했었고, 밴드 활동을 하며 소리 연구에 푹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명리학자는 내게 "올해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도 괜찮다"는 기분 좋은 말을 해주었다.
오히려 본업보다 더 잘 풀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영어, 음악, 영화 같은 것을 하면 좋다고 했다.
남의 말에 잘 휩쓸리는 나는,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다, 사주까지 나를 밀어준다고 하니 일을 벌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참고로, 소흐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말 안 듣고 있다.)
그 시기, 영어 공부를 함께하던 수다방에서는, 내가 부른 노래를 올리면 기타를 가르쳐달라는 메시지가 오곤 했다.
나는 '누가 누굴 가르쳐?'라며 웃어넘겼지만, 사실 그런 요청은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을 엄마에게 조심스레 졸라 보는 아이처럼, 간을 보는 말 같았다. 깊은 뜻 없이, 말이 먼저 달려가는 그런 거...
사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진심이지만, 무거운 책임까지는 바라지 않는 그런 뉘앙스. 그래서 가볍게 넘겼다.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어렵다.
기타를 가르쳐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제대로 안 하면 그냥 버리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번엔 여러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넘길 땐 가벼워도 결심하면 무거워 진다.
연습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을 강요할 수는 있어도, 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번에는 기타를 조금씩 쳐본 사람들이었다.내 밑천은 금방 털릴 거라며, 몇 번의 요청에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지난번, 미디 선생님에게 들었던 ‘가르치면 는다’는 말도 떠올랐다.
여러 공부를 시작하면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나중에 오르거나 안 오르면 그만”이라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덕분일지도 모른다.
저 제안이 쓰기도 달기도 했는데, 일단 먹고 나서 감상을 말하자.
그래서 수락하게 된 것 같다.
그들이 '조금' 친 만큼, 나는 '조금 더' 쳤다. 그 차이로 버텼다.
그즈음 수다방에서는 '내마다: 내 인생 마지막 다이어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서 착안해 '내마기: 내 인생 마지막 기타 교실'이라는 이름의 톡방을 열었다.
로고도 만들고, 커리큘럼도 짰다. 그리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마기 1기: 3명 모집'이라는 전단지 문구 같은 글을 써서 홍보했던 것 같다.
그렇게 F코드에서 멈춘 사람, 10년 전에 기타를 잡아봤지만 한 곡도 완주해 본 적 없는 사람, 2개월 레슨 경험자, 그리고 깍두기로, 10년 차 교회 반주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의 마지막 기타 교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레슨을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이던 시기라 모든 모임은 줌으로 대체됐다.
나는 이 기타 교실을 위해 줌 프로 계정을 결제했고, 학생 관리를 위해 노션 연결제도 끊었다.
시간도 쓰고, 돈도 쓰고, 배움도 나눴다.
어릴 적부터 '호구'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열정을 쏟는 것이 즐겁다.
무엇보다 돈을 쓰면 진심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결국 훨씬 더 큰 것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 나는 다양성의 확장을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사회에서 가장 아래층에 있는 차별 대상자라는 사실을 인지한 이후, 의도하지 않아도 혹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다양성에 열려있자는 결심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다양성이란 단지 차별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삶의 방식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걸 왜 해?' 같은 말을 삼키는 일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는 연습을 했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건 정말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기타를 배우는 동안, 코드를 연결하는 과정이 마치 겨울철 얼어붙은 손가락처럼 굼뜨게 이어졌다.
나는 그런 느린 연결을 반복하며 연습했고, "왜 나는 쟤들처럼 소리가 예쁘게 안 나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원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집착하기도 했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땐 박자가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일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기타에서 나는 소리였지, 리듬감이 문제 된 적은 없었다.
밤헤엄 편에서 언급했던 기타리스트 친구에게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라고 물었을 때, 그가 강조했던 건 '메트로놈을 습관처럼 켜기'였다. 나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1. 처음부터 소리는 당연히 예쁘게 안 난다. 2. 박자감각은 초기에 잡아야 한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학생들에게 더 세심하게 가르치기로 했다.
나의 첫 번째 실수는, 당연히 모두가 예쁜 소리와 박자 감각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을 보며 리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경험 부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춤을 춰본 적이 없고, 음악을 자주 듣지 않았다면 리듬을 모를 수도 있다.
나 역시 리듬감을 타고난 게 아니라,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익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배우는 학생들을 보며 '왜 이게 안 되지?', '왜 이런 방식으로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가르쳐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사고도 조금씩 확장되어 갔다.
처음이니, 반복되는 기초 연습보다는, 노래 한 곡을 완주하는 기쁨을 먼저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 곡을 준비했다. '너의 의미', 'Creep', 'Falling Slowly'.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했다.
4비트부터 겨우 배운 초보자에게 ‘너의 의미’를 팜뮤트 주법으로 시키다니.
팜뮤트는 초급 주법이지만, 입문자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군말 없이 따라와 준 학생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하다.
가운데 손가락만 접은 욕 같은 코드가 있다.
초보자들이 기타를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지점인 F코드라는 놈인데, 나는 F코드를 지겹게 연습할 수밖에 없는 'Creep'을 두 번째 곡으로 정했다.
여간 미친 선생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고통을 호소했다.
손가락이 짧아서 안 닿는다고 하소연들을 했지만,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직접 손가락 길이를 재보니 내가 제일 짧았다.
그 이후로, 아무도 손가락 길이를 탓하지 않았다.
처음은 당연히 어렵다.
어떤 문제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결국은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무언가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건 '겸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겸손하지 않으면 남에게 쪽팔린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그 감정을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결국 그 길을 떠나게 된다.
반면, 부끄러움을 견디며 계속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만큼 겸손한 것이다.
겸손은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대신 자기 비하 마스터가 된다..
기타를 가르치며 가장 놀랐던 건, 내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는 그저 코드 몇 개 잡고, 곡 몇 개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막상 가르쳐보니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하나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처음엔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방향으로, 그러니까 '감'으로 설명하고 나중에 찾아보기도 했다(ㅋㅋ).
그러면서 나도 더 깊이 배우고, 알게 되었다.
수업 자료를 만들며 정말 많이 공부했다.
자료 구성, 흐름 정리, 시각화. 본업이 디자이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가르치는 방법을 익히는 동안, 내 실력도 함께 자랐다.
리듬을 기호로 다시 그려보고, 규칙을 정리하면서 어렴풋했던 개념들이 선명해졌다.
그 과정 자체가 내게도 커다란 배움이었다.
처음엔 허세 부리듯 "음학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역시 학문으로 접근해야 한다. 음악은 감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음학'이 탄탄히 잡혀야, 그 위에 감정을 얹고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어느새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는데, 나라고 대충 할 수는 없었다.
매일 톡방엔 인증 영상이 올라왔고, 나는 그 모든 영상을 보고 피드백을 남겼다.
노션 안에는 나와 그들의 6개월간의 연습영상들이 아직도 가득있다. 페이지를 열면, 그 해의 생동감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내마기 1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2기를 모집했다. 1기 때 우리는 서로를 ‘도토리’라고 불렀다.
도토리 키재기처럼 서로 별 차이 없던 우리가, 이제 밤이 된 듯 더 단단하고 키도 좀 컸다고 해서 2기부터는 ‘밤토리’라고 불렀다.
2기는 1기의 수업 자료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각자 배우고 싶은 곡을 가져오기로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나에게 한 실수였다. 좋아하지 않는 곡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지겹게 들었다. 물론 학생 중심의 커리큘럼은 중요하지만, 나 역시 즐길 수 있는 수업이 되려면 그 균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2기 멤버까지 합류하면서 더 큰 판을 벌이게 됐다.
(추가, 다음주 예고?편)
아이를 키우며 공부하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영원히 겪지 못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안의 어떤 열정을 보며 감탄했고 감동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들은 정말 젊었다.
어릴 때 나는 어른이 되면 모든 걸 아는 어른으로 자라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멈추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들, 어디까지가 어른인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지만, 아직 어리다. 어리지만, 어른이 되어간다...
에잇 모르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어린이로서 설렘을 다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