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행복이 목표인 삶
얼마 전 일이다.
출근하고 얼마 안 된 시간에 엑셀 수식을 못 넣어 헤매다가 엑셀을 잘하는 친구에게 톡으로 SOS를 청했다. 금방 해결될 일이었는데,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게 문제였다. 이윽고 톡이 또 왔다.
-일하기가 너무 싫네. 아직 회사 더 다녀야 하는데 ㅠㅠ
반차 내고 쉬라는 뻔한 답을 해놓고 생각해 보니,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생각났다.
출근하기가 너무 싫어서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회사로 간다는 메시지를 스님이 된 친구에게 날리는 박동훈 부장. 얼마 후엔 출근하다 말고 몸을 돌려 친구의 절로 간다. 우리는 출근하던 몸을 휙 돌려 친구인 스님이 있는 절을 알고 있진 못하니 더 쉬운 방법을 찾기로 했다. 조만간 친구들끼리 반차라도 내고 모여 낮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자는 것이다.
그렇게 잠깐 떠들고 나니, 몇 년 전 세 번이나 반복주행했던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또 눈에 들어왔다. 박상훈, 박동훈, 박기훈 3형제, 이지안, 강윤희, 윤상무, 박상무, 도준영대표 등의 등장인물과 3형제의 엄마 변요순 여사, 사채꾼 광일이 등의 인물들까지 생생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던 이 드라마를 살짝살짝 다시 보기로 하고 넷플릭스를 열고 말았다. 사실 지금은 음성으로만 들어도 어떤 장면이 나오고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지만, 어떤 장면들은 보지 않는다면 그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없으니 볼 수밖에 없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세 번이나 반복주행했으니, 당연히 모든 장면과 모든 등장인물이 좋았는데, 그중에서 당연히 박동훈이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고야 말았다. 이 드라마를 보며 특히 좋았던 장면들이 몇 개 있는데 이런 것들이다.
#삼 형제가 참치집에 가서 참치 먹는 장면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참치가 먹고 싶어 진다. 상무후보에 올랐다는 박동훈의 말에, 기훈이 엄마에게 전화해하는 말 '엄마, 형 상무됐대!'
#박동훈이 혼자 식당에 가 맥주 한잔을 마시는 장면
-여기서 박동훈은 식당 주인에게 '그 애 안 왔어? 그 왜 춥게 입고 다니는 애, 이쁘게 생겨가지고'라고 물어보고, 그걸 도청하던 이지안은 숨차게 달려 박동훈이 계산하고 나가려는 참에 식당으로 뛰어들어온다. '한잔 하고 가죠? 한잔 더 해요'라는 이지안
#이지안이 서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동네 한 바퀴 한 후 헤어지는 장면
-'한번 안아봐도 돼요?'라고 묻는 이지안과 처음으로 안아주는 박동훈, 그리고 파이팅~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나는 소박한 시민들의 기쁨과 참치란 메뉴의 고급함에 대해(^^), 누군가를 떠올리며 얘기하는 단어와 방법에 대해, 그리고 마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이 장면을 보다 말고 친구들에게 '다음에는 참치?'라는 문자를 날렸으나 맥락을 모르는 친구들에게서는 별다른 답이 없었다.
박동훈과 이지안의 목표는 큰 성공이 아니라 소박한 행복과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내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며 박동훈과 이지안에 대해 공감했던 지점은 이것이다.
큰 성공과 부유한 재산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소박한 행복이 있는 평화로운 저녁식사를 꿈꾸는 사람들은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중에 선택할 수 있는 혹은 만들 수 있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사람, 다른 상황들 때문에. 20년 전쯤에 나는 일기장에 '쉬운 삶이 가장 어렵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난 이것이야말로 내가 쓴 문장 중에 삶에 대한 인사이트가 가장 깊은 것이라고 혼자 자족하곤 했다.
박동훈은 부부가 합해서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봐야겠지만, 아내와 대화가 없고, 저녁 식사가 없고, 잠자리가 없다. 드라마에서 박동훈이 잠을 자려고 할 때면 늘 강윤희는 서재에 있거나, 강윤희가 집에 없거나 서재에 있을 때 박동훈은 밖에서 술을 마시거나, 빨래와 청소기를 돌리거나, 티브이를 본다. 그러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곤 한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함께 얘기할 사람이 없고, 고민을 나눌 대상이 없다. 이지안에 따르면, '한 달에 돈 500만 원 이상을 벌어도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박동훈.
이지안은 어려서부터 불행하게 살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지안의 주변에는 엊저녁에 본 티브이와 지난주에 본 영화에 대해, 지난주에 또 오른 밥값에 대해, 이직하고 싶은 직장의 조건에 대해, 이사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보증금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얘기 나눌 사람이 없다.
그래서 박동훈과 이지안은 불행했다. 다행히도 불행한 사람들이 만나 더 불행해지지 않고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자기만의 길을 찾도록 도와줬으니 서로에겐 다행스러운 일이고, 드라마를 보는 나 같은 시청자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라마에서 나온 박동훈의 삶의 기준이라고 할만한 것들 중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옛날 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 해라' 그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져.
박동훈 부장도, 이지안도 소박한 행복을 지킬 수만 있다면 큰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그게 힘들었다. 박동훈 부장이 보기에 그 소박한 행복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저 정도 아니었을까? 너무 힘들 때 응원받을 수 있고, 예전일은 툭툭 털어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다행히 내 주변엔 아직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어 다행스럽다.
드라마에서 박동훈 부장이 상무로 진급한 후에 '정희네'에서 송골매의 '아득히 먼 곳'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많이 행복해야 하는 장면인데, 박동훈 부장은 괜히, 많이 쓸쓸해 보였다.
P.S: 어느 날 이선균 배우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좀 어처구니없어하다가 친한 형님이-이 형님이 누군가 자살했다는 뉴스에 심란해하며 같이 술을 마셨던 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연락을 해와 양재역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세상에는 작은 일에도 부끄러워 세상을 등지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일을 저지르고도 '그게 왜?'냐며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들어온 건 권선징악이니 결국 뿌린 대로 가게 되어있다니 하는 것인데, 과연 그게 맞는 말인지 의심 갈 때가 많다. 살아온 날이 늘어날수록 어쩌면 그게 세상 진리는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건 내 의심뿐일까? (이선균의 실수가 크다작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세상 사는 방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선균 배우가 죽고 그가 노래 부른 것이 있나를 찾다 보니 '나의 아저씨'에서 불렀던 아득히 먼 곳을 정식으로 부르는 영상이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회장님(신구)이 박동훈 부장을 '좀 억울하게 생긴..'이라고 했는데, 이제 보니 좀 쓸쓸하고 억울해 보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