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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보노야 Oct 10. 2024

송대현(가명)의 콤플렉스

젊음을 갉아먹은 열등감

송대현(가명)과 나는 어릴 적 동네 친구로 만나 인연을 이어왔다.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1년에 한두 번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만들어 모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전화 연락 정도는 생각날 때마다 했었는데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다. 직장을 잡은 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술자리에 없는 송대현에게 전화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보통은 시답잖은 얘기 끝에 '담에 보자'라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송대현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해서 수도권에 있는 모 국립대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만 다니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얼마 후 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 제대 후 2년을 더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이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하자 같은 나이의 사람들은 모두 졸업반이거나 졸업한 상태였기에 어울릴만한 동기들은 없었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생활을 즐길만한 여건이 안된 셈이었다. 


어찌 보면 송대현이 고시를 준비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낼 때쯤엔 서른이 되는데 기업입장에서 서른 나이의 신입사원을 뽑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구인 시장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무려 이십 년 전에 과연..


송대현이 처음 준비한 시험은 행정고시였다. 1년 간의 행정고시 준비 끝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고 준비한 것이 공인회계사시험이었다. 전공이 그쪽이다 보니 공인회계사 시험을 처음부터 준비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게 친구들의 생각이었지만 친구들의 생각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는 행정고시를 먼저 준비했고, 힘들다는 걸 느꼈을 때 공인회계사 시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 공인회계사가 되기에는 부족한 게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의 시험을 치른 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송대현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병아리 감별사' 시험 준비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들은 후 나와 내 옆의 친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우리들은 하나같이 별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잠시동안'


그날 술자리가 파하기 전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농담처럼 '야, 뜬금없이 병아리 감별사는 뭐냐'라고 하며 나도 그도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나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병아리 감별사 시험을 봤는지, 혹은 통과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가 병아리 감별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건 그저 '준비한다'는 것이지 진짜로 병아리 감별사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그걸 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후 몇 번의 전화 통화를 했지만 -모든 연락은 내가 먼저 했고, 그는 먼저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다- 나와 송대현의 연락은 끊겼다. 





송대현과 나는 시골에서 함께 자랐는데, 송대현의 아버지는 그 지역에서 나름 잘 나가는 회사원이었다. 커다란 공기업 하나로 살아가는 지역사회였기에 한 다리만 건너면 대부분 알게 되는 곳이었다. 송대현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몇십 명 되지 않는 대졸자였는데, 당시 그 지역에서 대졸자 회사원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서울 본사로 취업해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왔지만 그 커다란 공기업이라는 것이 사업의 기반이 모두 이 지역 사회에 몰려있으니 무언가 부족해서 밀려난 발령은 아니란 얘기였다. 송대현의 아버지처럼 대졸자로서 관리직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정직급이 되면 서울 본사로 돌아갔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나의 아버지처럼 학력과 배경이 보잘것없는 상황에서 관리직을 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맡은 자리에서 정년을 마쳤다. 


송대현의 형은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에 우리 친구들은 '역시 너희 형은 대단하다'라는 식으로 그에게 축하했지만, 그는 별거 아니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송대현과 우리가 아직 고등학생일 때 그를 몇 번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데 키가 크고 얼굴이 갸름한 것이 쉽게 정이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는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들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시험을 준비할 때까지도 그의 부모는 그를 뒷바라지했다. 한동안은 건설현장에 식사를 대는 함바집을 하기도 했는데 큰돈을 벌었다는 말보다는 고생스러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큰 아들이 취직 그리고 결혼 후 독립했지만 작은 아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확실치 않은 미래를 준비 중이었고, 그의 부모는 그 미래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의 술자리에서는 어느 날부터 송대현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러다가 내가 시골에 볼 일이 있어 가면서 친구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면서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https://brunch.co.kr/@sohon/102송대현은 현재 귀향해 고향 인근의 소도시에서 작은 공부방을 하며 결혼은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 시골에 내려가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나와 그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와 나는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불편한 감정과 낯선 감정, 그리고 만나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오래된 시답잖은 이야기뿐이니 술자리는 재미없고, 지루하며 불편할 것이다. 


그에 대해 생각할 때 나와 친구들이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는 대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릴 적 우리가 살던 시골동네에서 함께 뒹굴던 친구들의 목표라고는 모두 같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회사 취직하자' 그건 우리가 자라온 환경이 그랬고, 보고 들은 이야기가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커왔지만 송대현의 목표에 대한 갈망은 집착에 가까웠다. 나는 그 이유가 부모님의 기대 충족, 형에 대한 열등감 등에 원인이 크다고 생각한다.


송대현은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잘난 형밑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자랐다. 우리와 별걱정 없이 잘 놀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늘 '잘나야'하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거 같다. 반장을 해야 하고, 1등을 해야 하고,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가야 하고. 그런 강박과 열등감이 그의 젊음을 갉아먹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만이 아는 그에 얽힌 뒷이야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는 아마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서울이나 대도시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부모님의 기대와 형에 대한 열등감 외에도 사귀던 여자친구의 배신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5년 이상을 사귀던 여자친구는 대학에 떨어지자 그와 헤어진 후 그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고 결혼 약속까지 했지만 결국 그 친구와도 헤어졌다. 이런 막장 아닌 막장 같은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많다.) 송대현이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이 그가 대학 입시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나와 친구들의 공통된 생각이지만, 그 속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잘 살고 있냐?'라는 내 물음에 그는 '그냥 사는 거지. 잘살고 못살고 가 어디 있어. 바빠'라고 답했다. 그가 살면서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느껴온 열등감이 이제는 좀 사라졌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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