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와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나는 중학교 때 도시로 나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박용수는 시골,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나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전해 들은 바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시로 나가 취업을 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 친구가 겪었다는 많은 일을 모두,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칠 년 전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서류와 고향에 대한 기록 몇 가지를 알아보러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다. 가족 없이 혼자 2박 3일의 일정을 계획하고 간 것이었는데 고향의 기차역에 도착해 역사를 나서자마자 2박 3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계획 없이 세운 일정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내 머릿속에는 고향의 시골 사택, 도로, 놀이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운동장 등이 초등학교때 지각했던 수준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었다. 그러니 역사를 나서자마자 낯익은 풍경이 낯선 크기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역사를 나와 오래전 살던 시골 사택으로 걸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는데 내 머리는 40~50분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일했던 회사에 들러 필요한 서류를 떼고, 일부 사택을 허물고 지어둔 텅빈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나니 아직 오후 세시도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운동장을 기웃거리다가, 오래전 살던 사택을 허물고 지은 아파트와 아파트 앞의 구멍가게 앞을 지나고, 오일장이 서던 우체국 앞의 작은 시장 골목을 서성거리고 나서 너무 대책 없이 내려왔단 생각이 다시 들었다.
다섯 시가 되어갈 때쯤 친구들에게서 수소문한 두 개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한 명은 서울에서 살다가 십 년 전쯤 귀향한 친구이고, 또 한 명이 박용수였다. 첫번 째 친구에게서 오늘은 안되고 내일 오후 늦게 시간이 되니 만나자는 답을 들은 나는 알았으니 내일 오전 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또 한 명인 박용수는 마침 일을 보러 강릉에 나가있는데 밤이 늦어서야 돌아갈 거 같다며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 전화번호를 더 찾아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나는 거리를 배회하며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국 손님 없는 치킨집에 들어가 치킨에 맥주를 들이켜고 밤길을 혼자 배회하다가 9시도 안 된 시간에 모텔로 들어가 억지잠을 청해야 했다.
그때쯤 박용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일이 끝나서 돌아가야 하는데, 11시가 조금 넘으면 도착할 거같은데 괜찮을까?
-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문 연 가게도 별로 없을 거같은데.
-그렇지? 요새 늦게까지 잘 안하긴 해. 그럼 내일 저녁에 친구들 몇 명 불러 모을 테니 같이 보는 게 어때? ***, ***, *** 아나?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네. 일단 조심해서 와라.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하자. 이틀밤을 자고 가려고 생각은 했는데, 집에 일이 있다고 해서 내일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암튼 내일 연락하자.
나는 또다시 대낮에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고, 커피숍을 찾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도착 후에 볼일을 마치고 난 다음부터 불현듯 몰려온 마음의 불안감, 그것이 불안감인지, 낯섦에서 오는 초조함인지, 우울함인지 모를 것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을 때쯤에는 이미 아내와 통화를 하며 내일 오후에는 집에 갈 거같다는 말을 해둔 상태였다.
다음날 오전 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일이 있어 올라가야 할 거같다라는 말을 전했을 때 두 친구 중 박용수는 유독 많이 아쉬워하는 듯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보자'라는 말을 했지만, 살면서 그 '기회'라는 것을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과연 살면서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까?
박용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서울로 돌아오고 이틀 후였다. 원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고, 고향에 간 김에 연락처를 수소문해 통화를 나눈 친구라 의아하기도 했고, '조금은'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박용수가 건넨 말이 많이 뜻밖이었다.
-잘 올라갔어?
-그럼, 잘 올라왔지. 못 봐서 아쉬웠네. 소주 한잔 했어야 했는데.
-그러게. 얘기도 못했네. 결혼은 했지?
-그럼, 애가 둘인데. 너도 결혼했지?
-어, 나도 했지.
-그렇군. 그런데 어쩐 일이야?
-........
-........
-다른 게 아니고, 좀 미안한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응?
-아니, 내가 일을 하는데 요새 좀 힘들어서. 사실 이혼하고 애를 키우는데 일이 그냥 그래. 기존에 빚도 좀 있었고, 그래서 갑자기 생각난 사람이 너밖에 없네. 혹시 좀 안될까?
-음...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좀 힘들 거 같아. 민망하긴 한데, 내가 예전에 사업하다가 잘 안 돼서 아직도 개인회생 중이거든. 도움을 못줘서 미안하네.
-아, 그렇구나. 네가 서울 산다고 하고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고 하니 여유가 좀 될 거 같아서 얘기했는데, 괜히 불편하게 했네.
......
박용수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시로 나가 취업을 했고, 이후 강릉과 울산, 동해 등에서 일을 하다가 삼십 대 중반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 일은 창고, 제조 공장, 운송 등의 일로,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분야였고, 직장에서 만난 전)처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아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후 운송 일을 하며 도시를 오갔지만 돈벌이와 생활의 문제로 싸움이 잦았고, 아이가 중학교 때 아내는 집을 나갔고 결국 얼마 후 정식으로 이혼했다. 아이는 박용수와 살고 있다고 했다. 박용수가 얘기한 이혼과 빚의 결정적 이유는 도박이라고 했다. 도박 때문에 빚이 생겼고,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다가 사채까지 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박용수가 진 빚의 규모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에게까지 전화를 했을 정도면 많이 몰린 상황이었을 것이다. 박용수는 딸아이가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와 걱정이 많다고 했다. 어쩌면 그게 박용수를 가장 힘들게 했을 것이다.
박용수가 살고 있는 나의 고향은 내가 떠날 당시만 해도 인구 5만의, 당시로서는 꽤나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인구 1만도 안 되는 작은 소읍으로 전락했다. 낮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상설 시장을 들어서도 문을 연 가게는 별로 없다. 박용수가 정확히 말을 하지 않아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도시를 오간다고 하는 걸 봐서는 운송이나 판매 등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나는 박용수를 잘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때같은 반에서, 같은 운동장에서 같이 뛰어논다고 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는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그저 초등학교 때 같이 코 흘리며뛰어놀던 추억을 나눌 정도인시골 친구일 뿐이다. 나는 박용수가 착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추억을 나눈 고향 친구라 해서 고통을 공유하고 나눈다는 건 힘든 일이다. 변명을 하자면, 나 또한 사업을 하다 잘 안되어 개인 회생과 법인 파산을 거치며 힘든 시간을 오래도록 보냈고, 박용수 또한 빚을 많이 진 상태로(그가 한 말로 미루어 짐작) 아이 하나를 키우며 힘들게 살고 있는 상황이니 어찌 보면 둘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용수가 어찌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구십이 훌쩍 넘은 나의 어머니가 어느 해 추석날 만두를 빚으며 하시던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먹고 살길이 없어 아버지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돈 5만 원을 들고 시골집을 나서던 때를 추억하며 밀가루 한포대로 한 달을 먹고살던 얘기를 내게 하고 있었다. 구십이 훌쩍 넘은 나의 어머니는 아직도 내 걱정을 한다. 사업은 잘 되는지, 애들은 잘 크고 있는지, 집에는 문제없는지, 그럴 때마다 오래전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 비슷하게 나도 대꾸한다.
-엄마, 각자 다 알아서 살게 되어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엄마 건강만 걱정하세요.
박용수도 곧 잘 살거야라는 말은 무의미한 바램이다. 아니, 박용수는 아마 꽤 오랫동안 힘들게 살 것이다. 박용수의 딸아이는 박용수의 힘듦을 거울과 지렛대 삼아 박용수와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