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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08. 2020

아무 날도 아닌 날 꽃을 선물해줘요

스물두 번째 한 글자 주제, 꽃


아무 날도 아닌 날이었다.


덜컹덜컹 출근해서 그새 또 밀려있는 업무로 오전을 다 보내고 똑같은 사람들과 비슷한 주제로 얘기하며 점심을 먹었다. 회사 욕도 했을 거고 상사 뒷담화도 오갔을 거고 로또도 안 되는 인생 의미도 없단 넋두리도 있었겠으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일과 일 사이의 점심이란 늘 그런 식이니까. 희망차고 밝은 메시지보다는 축 쳐지고 우울한 얘기가 메인 반찬이 되는 게 다반사니 별다를 것도 없었다.


하여간 그렇게 길지 않은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꽃집이 하나 있었다. 오다가다 꽃집이 보이면 습관처럼 눈요기로 삼는 편이라 이번에도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지나치는데, 같은 팀의 제이가 우뚝 멈춰 섰다. 꽃집에 들려야겠다고 했다. "엥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의아하게 물었지만 걸음도 빠른 제이는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선 후였다. 아무렴 어때, 우리는 두 번 묻지 않고 얼결에 꽃집으로 따라 들어섰다. 꽃 구경은 질리는 법이 없고, 점심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가는 건 늦어질수록 좋은 법이니까.


투명 쇼케이스 앞에서 제이는 한참 서성였다. 이게 예쁜가, 저게 싱싱한가, 이게 라넌큘러스라고 했던가, 이거랑 저거랑 같이 두면 예쁘려나, 한참을. 몇 마디 옆에서 거들고 같이 골라보기도 하다가 크지 않은 꽃집을 슬렁슬렁 돌아보았다. 꽃도 많고 나무도 많아 사람이 다닐 길은 좁았고 걸음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특이하게 생긴 선인장과 예쁜 화분에 담긴 초록이들을 구경하는 동안 제이는 꽃을 다 고른 모양이었다. 어느새 플로리스트 분이 포장을 하고 있기에 나도 계산대 쪽으로 다가섰다. 꽃은 두 송이뿐이었지만 보색이 대비되어 화려했고, 초록색 이파리를 가볍게 곁들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제이는 곧 값을 치르고 꽃을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자!" 하는 효과음과 함께 꽃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제이는 꽃도 주고 사진도 찍어줬다




벌써 다섯 달이 지난 일인데 이렇게 생생한 건 그 날이 아무 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꽃을 선물 받을 만한 이유도 없었고, (막 우거지 해장국을 먹고 나온 참이었으니) 딱히 그런 타이밍도 아니었다. 아무리 친해도 회사에서 만난 같은 팀 동료 사이인데 그런 걸 기대할 만한 관계도 아니었고. 제이는 그냥 그 날따라 내가 힘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회사 힘든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묘하게 우울해 보여 괜히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꽃을 옆에 두고 일하면 조금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머쓱하게 얘기하면서 그 예쁜 꽃을 나에게 주었다. "뭐야 너 왜 이렇게 로맨틱해?"하고 감탄하는 사이에, 여기서 찍자 저기다 놔보자 하면서 꽃 사진을 백여 장 찍는 사이에, 꽃대 끝을 비스듬히 자르고 깨끗한 물에 꽃을 꽂는 사이에 이유도 모를 일상의 우울감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무 날도 아닌 날은 곧 어떤 날이 되었다. 평소의 점심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웃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대도  했던  선물은 그만큼의 환기력이 있었다.







원래도 꽃 선물을 좋아한다. 받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는 것도 좋아한다. 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으니까. 꽃이 좋은 선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견해가 꽤나 갈린다는 건 알고 있다. 금방 시들 거 뭐하러 비싼 돈을 쓰냐고,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거 아니냐고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도 보았다. 틀린 말도 아니다. 실용성을 따지자면 꽃만큼 쓸모없는 선물도 없다. 누구에게도 꽃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받아 든 기쁨도 잠시, 매일같이 깨끗한 물로 갈아가며 모셔두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꽃은 져버리고 마니까. 그러나 나는 그 무용함에 더 마음이 쓰인다. 금방 져버릴지언정 이 순간만큼은 너를 기쁘게 하고 싶다고 내미는 꽃을 좋아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서, 오히려 온전히 주는 이의 마음만을 담고 있는 선물을.


그 무용함이란 특히 아무 날도 아닌 날 빛을 발한다. 의례히 선물과 함께 건네지는 생일의 꽃다발이나 기념일의 꽃 한 송이도 충분히 좋아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무 이유 없이 내밀어지는 꽃을 좋아한다. 이런 날에는 꽃을 선물하는 거라 들어서 부랴부랴 찾아가 사온 꽃도 좋아하지만,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꽃집이 보여 대뜸 사들고 온 꽃을 좋아한다. 다행히 비슷한 데 마음을 빼앗기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종종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꽃을 선물 받는다. 아무 날도 아닌 날을 금세 좋은 날로 만들어주는 꽃을. 커다랗고 화려하게 포장된 다발이 아니라 크래프트지 한 겹으로 대강 감싼 들꽃이라도 좋다. (오히려 그런 날엔 그런 꽃이 더 좋다.)


애인들에게도 '아무 날도 아닌 날 받는 꽃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에 대해 여러 번 설파해보았으나 남자애들은 꽃에 더 인색했다. 생일날 한 다발 선물해주면 고마울 정도. 한 번은 어떤 남자애가 사귀자는 말 대신 정말 내 취향의 꽃다발을 내밀기에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면서 그러마 한 적도 있었다. (비록 꽃다발은 플로리스트의 감각이 십분 발현된 것일 가능성이 컸지만) 이 정도로 취향인 꽃다발을 들고 올 줄 아는 남자라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쩌다 꽃집을 잘 찾은 거였는지 그 뒤로는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울 뻔했지만. 그 연애는 와장창 망했지만 적어도 그 꽃을 받아 들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습효과도 없이 누가 그런 꽃다발을 대뜸 들고 오면 아마 또 홀랑 넘어가버릴 게 분명하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친구든 애인이든 직장동료든, 그 순간에는 그냥 걔를 꽉 끌어안고 싶겠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열심히 골라 소중하게 안고 나를 만나러 온 마음이, 꽃 송이송이에 담뿍 담겨있을 테니까.






사람은 무의식 중에 자신이 받고 싶은 일을 남에게 해준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종종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꽃을 선물하게 된다. 생일이라 만나는 날에는 멋없이 선물 하나만 건네 놓고, 그다음에 만날 때 괜히 꽃 한 다발을 들고 간다.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니까 한 다발, 혹은 날씨가 좋으니까 한 다발, 이게 꽃집 앞에 꽂혀있었는데 지나가다 너무 예쁘길래 한 다발, 그냥 한 다발. 재작년에는 플라워 클래스까지 등록했었는데, 매주 두 시간을 온전히 내어 꽃을 만질 수 있는 것도, 서툴지만 내 손으로 직접 완성한 꽃을 그 날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대뜸 내밀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소질까지는 없는 것 같아 두 달 하고 관두었지만 봄이 다가오니 괜스레 다시 마음이 들뜬다. 시간이 꽤나 흘렀으니 다시금 문을 두드려봐도 좋을 것 같고.


 "웬 꽃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여전히 꽃은 무슨무슨 날에만 주고받아야 할 것 같은 선물이라, 불쑥 내밀어진 꽃을 보면 나 역시 그렇게 묻곤 한다. 아무 날도 아닌 날 더 자주 꽃을 내밀고 그 질문을 듣고 싶다. 별달리 기념할 만한 것도 축하할 만한 일도 없어서 꽃을 보고 크게 뜨이는,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 물음엔 대답 대신 그냥 멋쩍게 웃어야지. 뭐, 아무 날도 아닌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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