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도 미루는 열정 (92일의 사랑)
정말 다행스럽게
방학이 늘 갖고 오는 마법이 이번에는 안 통한 것 같다.
정말 기특하고 다행인 방학이었다.
그것은 바로, 초기화의 마법을 말한다.
짧게는 3주에서 4주 정도 집에서 휴식기를 갖고 오면
예습은 바라지도 않고, 1학기에 배운 것들이라도 잘 붙들고 있어 주면 좋겠는데
사교육은 사치, 학습지도 집에서 할 수 없는 우리 반 아이들은 한 학기의 학습이 모두 초기화되어 돌아온다.
그런데 개학 후 아이들은 그 초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감사하고, 감탄하고, 감동할 일이다.
집에서만 있던 시간이 무료했던 것인지 수업에도 열정이다.
수업시간이 시작하기 무섭게 자리에 앉고 책을 펴고 나를 바라본다.
재잘재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도 나의 아이들은 배움이 많이 느린 아이들이다.
지금 배우는 것들은 이미 배웠어야 하는 것들이고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배움에 있어 아이들의 태도는 제법 진지하다.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스스로의 실력에 감탄한다.
한 학기 내내 한글 배움 속도가 느려 걱정했던 봄이가 가장 열심히다.
받침이 없는 이야기 글을 줄줄 읽는다.
"봄아, 이제 점심시간이야. 우리 하던 곳까지 표시해 두고 5교시에 이어서 할까?"
"잠깐만요. 기다려 주세요."
나의 아이들은 기다려 달라는 말을 자주 이야기 한다.
나는 그것이 그저 지켜봐 달라, 함께 해 달라는 의미임을 알기에 묵묵히 바라보고 기다려주었다.
'실은 선생님 배 많이 고파... 빨리 하자.'
선생님과 학생의 마음이 바뀌었다.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낀 아이는 쉽게 책을 놓지 않는다.
다음장을 넘기고, 마지막 이야기까지 책을 읽는다.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어가는 목소리가 밝고 경쾌하다.
아이의 손 길이 지나는 곳마다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 같다.
그 명랑한 목소리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가고 있지만, 이미 많이 늦었다고 하지만
나의 아이들은 누구보다 즐겁게 가고 있다.
배움이 힘들고 고된 것만이 아닌
즐겁고 힘을 받는 것,
누군가의 지지로 내가 서는 시간임을 온몸으로 느끼길 바란다.
그렇게 함께 지지해 주고 격려해주려 한다.
배움은 즐거운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건너고 있다.
내일의 배움과 가르침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