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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해지기와 무르어지기 사이

by 소화


“선생님, 엄마는 아직 왜 나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걸까요?
너무 속상해서 혼자 울었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말 끝마다 작은 파도가 밀려왔다.
돌봄 쉼터에서 지내는 생활이 “좋다”고 말하는 아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때로는 선물도 받는다고, 그게 고맙다고. 그러면서도 말한다.
“그런 게 조금 불편해도 괜찮아요. 엄마랑 살고 싶어요.”


아이의 마음 한가운데엔 숫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100일, 그리고 또 100일, 다시 100일.
달력이 넘겨질 때마다 약속은 다음 계절로 밀려나고, 기다림은 단단해지는 대신 굳어졌다.

아이는 어느새 체념을 배웠다.


“뭐, 엄마도 사정이 있겠죠. 기다리다 보면 되겠죠.”


아홉 살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웠다.
그 어른스러움이 기특하기보다 마음이 시렸다.

세상은 아이에게 먼저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수업은 늘 비싸다. 울음을 삼키는 대가로, 밤마다 스스로를 달래는 대가로,

마음이 조금씩 각지는 대가로.


나는 아이에게 “금방 좋아질 거야”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 척 희망만 건네는 말이 이 아이에겐 더 멀게 느껴질까 봐.

대신 우리는 지금 이곳의 좋은 것들을 붙잡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오늘은 아침에 따뜻한 국이 나왔잖아.”
“응, 김도 맛있었어요.”
“어제는 네가 먼저 인사해 줘서, 선생님 진짜 기뻤어.”
“제가요? 헤헤.”


우리는 ‘지금’의 작은 빛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문득 아이에게 물었다. “그 빛들을 어디에 모아둘까?”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 가슴을 톡, 두드렸다.
“여기요.”


그 말이 참 좋았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 내일 엄마가 오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건너는 방법을.

가슴속에 불씨 하나 지켜두는 법을.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지지 않는 불빛을 키우는 일을.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보았다.
“우리는 두 가지 힘을 함께 키워보자. 하나는 단단해지는 힘, 다른 하나는 무르어지는 힘.”
단단해지는 힘은 거절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는 힘,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다.
무르어지는 힘은 남의 사정을 헤아리고, 울고 싶은 날 울어도 된다고 허락하는 힘이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단단함만 있으면 마음이 굳고, 무름만 있으면 금세 부서진다.

우리는 두 힘을 하루의 양손처럼 번갈아 쥐고 가야 한다.


아이와 작은 약속을 하나 했다.

내일 아침, 문을 열고 학교 오는 길에 “오늘의 빛 하나”를 찾아보기로.
복도 끝 창으로 들어오는 빛, 밥그릇에서 올라오는 김,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 쓰다듬어 주는 손등—

그중 하나라도 가슴 주머니에 넣어두자고.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 그 빛을 한 번만 더 꺼내 보기로.


“선생님, 그럼 저는 오늘의 빛을 두 개 넣을래요.”
“왜 두 개나?”
“혹시 하나는 길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는 세상보다 먼저 배웠다. 잃어버림을.

그래서 더 지혜로웠다. 나는 아이에게서 다시 배웠다. 소중한 것을 두 번 챙기는 법을.


엄마의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못해 약속이 더 멀어지는 날,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탓은 쉬운데, 다시 일어나 걷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되지 못한 마음들”도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그 마음들 또한 언젠가 늦게라도 배우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조용히 품어 보기로 했다.


가을빛은 오늘도 사무치게 맑다.
아홉 살의 가을은 그래서 더 시리다.
하지만 그 시림 속에서도 아이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 불씨 곁에서 손을 녹이며,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한다.


“네가 기다린 만큼, 너는 이미 많이 자랐어.
우리는 오늘도 ‘빛 하나’를 찾을 거야.
그리고 그 빛이 길이 되는 쪽으로, 같이 걸어가 보자.”


어쩌면 어떤 약속은 내일도 미뤄질지 모른다.

그래도 아이의 가슴 주머니엔 오늘의 빛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잃어버려도 괜찮으라고, 다른 하나는 꼭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아이는, 그리고 우리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무르어지며,
가을의 끝에서 겨울을 건너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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