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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08. 2019

혼자라서 외로운 당신에게

 가을이 깊어지면 왜 외로움이 밀려들까.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 낙엽들을 밟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바스락거리는 것 같은 느낌은 뭘까. 이 계절의 공기가 주는 쓸쓸함과 허전함이 숨 쉴 때마다 내 폐 속으로 들어와, 명랑했던 나의 마음은 점점 사그라들고 그 자리를 외로움으로 채우는 것일까.

더는 떨어지지마... 뉴욕, 센트럴파크의 가을도 외롭다.

 외롭다. 가을이면 원래 그런 경향이 있는데, 연주회 준비로 '자의적'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의 나는 무척 외롭다.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백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었다고 하는데, 같이 있던 호랑이가 뛰쳐나가고 나서부터 곰은 어떻게 버텼을까. 곰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 나야 뭐 곰처럼 극한 상황은 아니지만, 고3 이후로 이렇게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사람 대신 피아노를 마주하고 있는 내가 집에서 내뱉는 말이라곤, 원하는 대로 곡이 연주되지 않았을 때 나오는 탄식이나 나도 모르게 나오는 흥얼거림 정도이다. 사람들 만나서 떠들기 좋아하는 나의 입은 이제는 주로 먹는 일에 쓰이고 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냉장고 안의 식품들, 살찔까 봐 어쩌다 먹었던 라면과 과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고, 커피 원두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아티스트는 섬세한 감성이 있어야 돼. 섬세하려면 왠지 말라야 될 것 같아.”라고 지금 나의 상태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얘들아, 이번 기회에 한 번 말라보고 싶어서 해본 말이야. 쑥과 마늘만 먹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환웅신화와 관련있는지 몰랐네요.  사진 :세계일보

 피아노 연습이야 당연히 혼자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외에 내가 하는 다른 일들도 누군가와 같이, 함께 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거나. 아, 그러고 보니 스피치 수업은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이긴 하다. 그래, 그렇구나. 요즘 수업 가는 게 그래서 그렇게 기다려졌구나. "아니, 마흔 넘은 어른이 혼자 일하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혼자여서 심심하다고 투정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만둔 지 4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15년을 한 회사에, 한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같이 생활해왔던 디엔에이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터라, 말없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아직 완전히 적응이 되지는 않았나 보다. 일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가 매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어도 늘 할 말이 많았던 그때의 나. 친구랑 한 시간 넘게 통화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고 말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어딜 가겠나.


 연주회를 앞두고 나도 사람 만나는 일을 자제하고 있지만, 지인들도 나를 만나는 일을 자제하고 있다. 내 경우에는 정신을 온전히 피아노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조치였고, 지인들은 나를 조용히 응원하기 위해,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래야 한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고, 내 연주는 고칠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나는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곰처럼 잘 버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되는데, 보기와 달리 솜털처럼 가벼웠나 보다. 몸이 들썩이고, 마음이 들썩인다. 피아노 연습하느라 힘들지 않으냐고 전화한 후배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넘치는 TMI 속에 통화 시간은 점점 길어져, 이럴 거면 잠깐 만나서 얘기할 걸 그랬나 싶다.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하다. 이 기세에 힘입어 다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본다. “내일 만나서 잠깐 커피나 한 잔 할까?” 친구가 사정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다행인 건가.


 집이 아닌 밖에서, 누군가 내려주는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혼자인 게 싫어서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었지만, 요즘 나의 콘셉트는 ‘피아노만 연습하는 아티스트’ 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훗. 이병률 작가의 “혼자가 혼자에게”라는 책이 혼자 마시러 나온 이번 커피 여행의 동반자로 적합할 것 같다. 입동 기념으로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첫 장을 넘겼다. 작가는 신춘문예 원고를 보내러 우체국에 들른 청년을 보고 자신도 예전에 많은 고배를 마셨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떨어지는 것은 절대로 중요한 일이다.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선의 의미만큼이나 중요하며 역시나 안 되었다는 것은 되기 위한 과정으로도 중대하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남에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도, 내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상실감과 오기 또한 필요하다는 것까지도 알게 해 주니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했던 지점이 정확히 그려진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때문일까, 아니면 읽고 있는 이 문장들 때문일까. 혼자 있는데, 누군가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 느낌이다.

 계속 읽어 내려간다. ‘혼자 사람’ 작가의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소신이 이어진다.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닥쳐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다.”


 아니, 그래서 그렇게 외로웠나. 몰랐다. 요즘 느끼는 외로움이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아주 중대한 과정을 겪고 있다는 신호였는지. 솔직히 외롭다는 감정에만 치여 그 너머를 돌아보지 못했는데, 새로운 발견이다. 이 과정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주변만 둘러봐도 그렇고, 예전의 나였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 특별한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심지어 아주 혼자도 아니잖아. 말은 못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는 낼 수 있는 친구도 함께 있잖아. 길어지는 연습 시간으로 더욱 단단해지는 내 손가락만큼이나 내 마음도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혼자 사람' 화가의 치열한 결과물. 사진:고승희 작가의 Summer Forest Part 1.

 제주도에 내려가 있는 ‘혼자 사람’ 화가 동생의 말이 떠오른다. “놈팡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정말 치열하게 매일 매시간 그림 그리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는 게 저예요.” 그래, 나의 수고는 나만 알면 되지, 다른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있나.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들을 음미하며, 다른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주인의식이 투철한 나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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