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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y 14. 2021

박아나의 일상뉴스

갑자기 집콕 2.5일차

티브이 앞에 일단 앉았습니다. 요리조리 리모컨을 돌려봅니다. 드라마 ‘빈센조’는 끝났고, 이어 새로 시작한 ‘마인’은 아직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사실 드라마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챙겨보는 편인데, 그동안 너무 챙겨봤나요. 제가 봤던 것들만 나옵니다. 재방송의 재재방송도 예전에 다 봤던 것들이네요. ‘나혼자산다’에서 제주에 놀러 간 장도연 씨가 밭에서 당근을 뽑고 있습니다. 제주에 간 것도 부럽고, 당근을 뽑는 것도 부럽습니다. 지금 어딜 갈 형편도 안되지만, 팔힘을 쓰면 안 되는 상황이거든요. 심지어 막걸리도 들이켜네요. 저는 당분간 금주입니다.


마침 ‘유퀴즈’가 나옵니다. 다행히 아직 보지 않은 회차입니다. 인생 10년 차 어린이가 나오는데, 단발 똑쟁이 머리 스타일이 취향 저격입니다. 몇 년을 길렀던 긴 머리는 소아암 환자의 가발을 만드는데 기부했다고 합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아이는 소아암 환자가 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기다리다 기뻐하며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너무 예쁩니다.


긴 제 머리카락을  부끄러워지게 만든 아이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고 합니다. 정말이냐고 재차 묻는 진행자의 말에 3월이 지나가는데 너무 오래 걸렸는데, 4월, 아마도 촬영시기가 4월이었나 봅니다, 은 아직도 안 가고 있다며 이내 지루한 표정을 지어 봅니다. 지루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이의 지루함과 나의 지루함은 다른 의미겠죠. 나이가 들면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고 느껴지잖아요. 어렸을 때는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어린이 시절의 저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도대체 언제 크리스마스가 오냐며 1년이 너무 길다고 불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여름 방학도 개학 일주일 전까지는 아직도 방학이라니...라고 생각했었죠. 지금이야 7개월 남은 크리스마스도 뭐 금방이겠구먼, 이라는 말이 나오지만요. 예전보다 정신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 아이들도 우리 때처럼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화가 옵니다. 아... 이 번호는... 전화를 받습니다. “나야, 00이야.” 친구입니다. 근데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 웬일이야...?” 전화 건 친구에게 웬일이라뇨. 사실 이 친구와는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전신마취로 기억력이 떨어져(?) 정확하지는 않지만 7,8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락이 그냥 끊어졌죠.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을까요? 제 기억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고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예전 일은 그냥 묻어버리기로 합니다. 지금 그것을 따져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웬일이야’라는 쿨하지 않은 말로 퉁쳐봅니다.


친구는 제게 괜찮냐고 묻습니다. 그동안 제 브런치 글들을 읽어 오고 있었는데, 아프다는 글을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겁니다. 예전과 변함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까의 어색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반가움이 가득 밀려옵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에게 엄살을 늘어놓으며 많이 아팠다고 이야기해봅니다. 친구는 고생했다고 토닥여 주네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주 만나서 어울리던 예전 그때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만 정신없이 늘어놓은 것 같아서 친구의 안부도 묻습니다. 벌써 중 2라는 친구의 아이,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친구야, 너는 별일 없니?


친구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년에 암수술을 했다고, 그래도 지금은 많이 회복했다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꼬입니다. 아까 마구 던졌던 제 엄살 가득 에피소드들을 주워 담고 싶습니다. 별다른 전조 증상 없이 발견된 암에 친구는 그동안 쌓아왔던 커리어들도 다 끝내야 했다고 합니다. 부장 말년이라 곧 임원 승진도 앞두고 있었는데, 암 수술 후 결국 사표를 낸 거죠. 부모님께는 수술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암 수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충격받을 부모님 생각에,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또 마음이 무너질 자신 생각에, 차마 입밖에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 한동안 눈물만 나왔던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명랑한 음성으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통 연락이 없었던 저와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시간은 붙잡을 수 없어 아쉽기도 하지만, 흘러가기에 다행인 것이기도 합니다. 친구의 시간은 흘러갔으니까요. 친구는 수술한 지 1년이 다 돼간다며 지난 3월부터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예전과는 같은 라이프 스타일로 살면 안 되기에 모든 것을 다 바꾸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도 그만두고, 불필요한 인간관계도 다 끊어냈습니다. 운동과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이젠 운동이 생활이 되었고, 식습관도 변했습니다. 제 농담에 격하게 웃어주는 것만 빼고요.


친구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고작 열흘 압박복 입고 배액관 달고 불평하는 제가 조금 철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한 시간 넘는 긴 통화 끝에 배액관을 떼는 즉시 만나기로 합니다. 그래요, 그동안의 세월이 얼마인데 만나서 이야기해야겠죠. 제 유머를 좋아하던 친구를 많이 웃겨주고 오고 싶네요. 그리고 친구가 제가 기억하던 그 모습에서 많이 변하지 않았기를 바라봅니다. 그동안 만나지 않아서 생긴 긴 공백과 최근의 아픔 때문에 너무 많이 달라져 있지 않길요. 아, 제 모습도 친구에게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집콕이 나쁘지만은 않네요.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도 되고. 그나저나 원래대로라면 부산 아트 페어에 가 있어야 했는데, 그건 좀 아쉽습니다. 휴...


p.s 친구야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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